[경상매일신문=신일권기자]지난 1일 오후 2시 포항시 남구 동해면 상정리 동양산업(주)에서 한국인 최초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한국인의 표상, 최준 선생의 흉상제막식이 있었다. 최준 선생 흉상건립추진준비위원회가 주관한 이날 행사에는 코로나19가 사회적 문제가 됨에 따라 외부인사를 초청하지 않고 조촐하게 진행했다.경주 최 부자로 알려진 최준 선생은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을 세우고 소작인에게 8할을 받던 소작료를 1600년대부터 절반만 받는 등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재평가 받고 있는 인물이다. 해방 직후에는 독립운동가인 故 최준 선생이 전 재산을 육영사업에 쓰기로 결심하고 선산과 만석지기 토지와 살고 있던 집까지 모조리 학교사업에 희사했다. 남인수 동양산업(주)대표이사·대한애국동지회장은 최준 선생의 흉상제막식 기념사를 통해 “재물은 똥거름(분뇨)와 같아서 한 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 견딜 수 없고 골고루 사방에 뿌리면 거름이 되는 법이다”는 최준 선생의 말을 인용하며 “우리는 엄숙한 마음으로 일제강점기에 임시정부 등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해방 후 나라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사업으로 사회에 환원한 최준 선생을 기리고자 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이어 “큰 부자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수백 년 물려온 모든 재산을, 심지어 친척들이 모두 뜻을 합해 사회에 환원한 역사는 세계적으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는 최준 선생이 남기신 나눔과 배려의 소중한 가치와 뜻을 받들어 전 세계의 가난을 구제하는 운동을 전개할 때”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남인수 회장은 “그동안 오늘 최준 선생의 흉상제막식이 있기까지 함께 해주신 애국동지회원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최 부자, 역사상 유례없는 4대 120년간 지속된 부(富) 부자에 대한 말이 많은 요즘, 4대 120년간 덕망을 지키며 부를 이어온 부자의 상징, 경주의 최 부자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많은 교훈을 일깨워준다.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양극화의 시대, 부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최 부자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최 부잣집 가훈...상생의 삶을 실천한 큰 사람경주 교동69번지. 대지 2천평에 1만여 평에 이르는 후원, 마당 한 켠에 800석을 쌓아놓을 수 있는 창고, 노비 숫자만 100여 명에 이르렀을 만큼 큰 규모의 집이다. 12대 400년간 부를 이어온 경주 최 부잣집. 1970년대 화재로 소실되고 주춧돌만 남았던 사랑채는 최근 복원되었다. 최 부잣집의 명성은 단순히 부의 규모 때문만은 아니다. 1671년 삼남에 흉년이 돌면서 굶어죽는 사람이 허다했을 때, 과감히 곳간을 헐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다. 형편이 어렵고 급한 사정으로 담보 잡힌 문서들도 가득했지만 불태워 불안을 덜게 해주었으며, 흉년에는 땅을 사지 않는 등 진정한 선비정신을 실천한 큰 사람이었다.“어렵고 힘들 때 이웃과 함께 하라!”는 상생의 나눔을 실천한 선한 영향력이 최 부잣집의 명성을 널리 알리고 12대 400년간의 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던 최 부자1910년. 나라가 망했다. 11대 최부자 최현식과 아들 최준은 집밖 출입을 끊고 매일 아침 북쪽을 향해 곡을 했다. 최현식(1854~1928)은 집안 살림을 아들 최준에게 넘겨주고 은거한다. 당시 최준(1884~1970)의 나이는 20대 중반, 망국한을 참기에는 혈기왕성한 나이였다. 그는 집안 살림에 몰두하는 듯 했다. 그러나 1915년에 조직된 비밀독립투쟁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回復團)’ 및 ‘대한광복회’ 주요 조직원으로서 자금을 제공하고 활동을 한다. 1917년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10월 출소되었다.1921년 태평양회의 독립청원서. 워싱턴에 보내는 조선 인민의 탄원서로 조선 독립을 호소하는 내용과 함께 각계각층 사람들의 서명을 담았다. 최준은 경주대표로 참여했다. 그리고 조선 독립 투쟁사에 큰 획을 긋는 만남이 이루어진다. 백산 안희제(1885~1943,독립투사)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백범 김구와 함께 양맥인 백산 안희제는 다각적인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 안희제가 1918년 최준을 찾아온다. 그는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부산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중요성을 최준에게 설명하며, 이 회사를 통해 독립운동자금을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는데 동참하자고 제의한다.최준은 안희제의 뜻을 받아들이고 백산상회의 사장을 만난다. 백산상회는 조선 최고의 무역회사로 성장한다. 최준의 장손인 최염(75세)은 최준의 소중한 문서를 내놓았다. 최준 앞으로 온 `대차대조표`였다. 무역업체로 위장한 <백산상회>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다. 막대한 독립자금을 제공하느라 <백산상회>는 늘 적자에 허덕였다.◆남인수 대한애국동지회장, 최준 선생을 평생 스승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삶 남인수 회장은 ‘월월이 청청’ 전통문화 보유자다. 제조업을 운영하면서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작업은 쉽지 않지만 지역문화에 대한 자부심 하나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세상에는 99억을 가지고 있으면서 1억을 더 벌어 100억을 채우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억을 가지고도 99억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며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말했다. 현재 대표이사로 있는 동양산업(주)는 직원 40여 명이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회사를 확장할 기회는 많았지만 욕심을 내지 않았기에 문화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그는 평생 최준 선생을 스승으로 존경하며 마음속으로 닮으려고 노력해왔다고 한다. 최준 선생의 삶을 생각하면 스스로 부족함에 항상 부끄러워진다는 그는 최 부잣집 육연(六然)·육훈(六訓)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번 최준 선생 흉상을 힘들여 제막한 것도 마음 깊은 곳에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왔기에 가능한 일이다.남인수 회장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을 타고났다. 포스코 인근 지역주민들이 공해 피해를 호소할 때도 외면하지 못하고 뛰어들어, 무려 10년간 고통을 함께 했다. “가난을 늘 만들어가면서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돈이 있어도 마음은 가난을 생각한다. 그것을 깨우쳤기에 사업을 하나 이상 하지 않는다. 사업을 확장해서 잘 될 수도 있지만 못되었을 경우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욕심내지 않고 나누려고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는 말했다. 그의 삶과 생명존중의 정신, 사업가로서의 경영철학은 나눔과 배려로 점철된 최 부잣집의 삶과 많이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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