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도 전쟁을 하는 나라다. 따라서 월남 내의 모든 대학생들은 학생이기 때문에 군 징집을 일시 면제하고 있을 뿐, 군사훈련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의무이므로 이를 상시화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1년 9월 21일, 월남의 명문대학 사이콩대학 문과대학생 260명의 긴급발의에 의하여 총학생 회장 “한 땀 맘”이 총회를 소집하고 의안으로 ‘군사훈련 거부’를 결의하였다.명분은 군사훈련이란 것이 ‘사람 죽이는 훈련’인데 “우리는 이 훈련을 통하여 같은 민족을 죽이는 살인 교육을 받고 있다. 따라서 이 훈련을 거부하는 것은 민족주의를 실천하는 순수한 민족애의 발로다”라는 성명서를 채택, 이날로부터 모든 훈련을 거부한다고 선언한 후 월남 내의 모든 대학생들은 이에 함께하기 바란다고 하였다.군사훈련을 받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에 전국의 대학생들이 동조하면서 ‘군사훈련 거부’ 시위가 날로 격화되었고 재야 세력과 연대하면서 ‘반정부 투쟁’으로 변모되었다.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사태에 이르자 정부의 강력한 단속이 시작되었는데 이에 대학생들은 결사적 항쟁을 계속하면서 마침내 ‘사이콩’을 해방구(공산당이 점령한 도시를 말한다)로 선언하였다.국가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제일 먼저 총을 들고 전선으로 내달려야 할 청년들이 국가 위기를 외면한다면 그 나라는 패망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청년들, 대학생들, 중학교 학생들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군번도 계급도 없이 학생 모자에 흰 띠를 두르고 전선으로, 전선으로 달려가 초개와 같이 묻혀 갔다. 그런데 월남은 얼마 후에 닥칠 암울한 국가 운명도 외면하고 데모만이 만사형통이라고 거리에서 세월을 보냈으니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오늘 대한민국 국민이 1975년의 월남을 비난할 수 있을까? 1975년 4월 30일 마침내 월맹의 군대가 사이콩을 점령하고 승리를 자축하는 “해방기념식”이 정부청사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는 낯설지 않은 한 사람의 모습이 등장하였는데 그가 바로 사이콩대학의 총학생 회장으로 군사훈련 거부 투쟁의 선봉에 섰던 “한 땀 맘”이었다. 그는 월맹의 노동당 핵심 당원이었으며, 월남에서 대학을 장악하라는 지령을 받고 파견된 간첩이었다. 그는 신분을 위장하고 대학에 침투하여 공작비로 중요 학생 간부들을 포섭하는 데 성공, 마침내 사이공대학 총학생 회장에 당선되자 “민족”이라는 가슴 뭉클한 대의를 제시하고 “훈련 거부”만이 현실적 대안이라면서 월남을 혼돈(混沌)에 함몰시킨 대단한 전략가였다. 1984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미ㆍ월 정치협상’의 월맹 대표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월남의 패망 국가가 풍전등화의 사태에 직면하였음에도 승려와 신부와 교수와 학생과 데모꾼들이 한 통속이 되어 끝없는 반정부 투쟁을 지속하였고, 군인들은 이러한 국민들의 행위에 환멸을 느껴 더 이상 목숨을 바칠 이유가 없다면서 이탈자가 속출하고 심지어 목숨을 지켜주는 무기를 월맹군대에 팔아먹기도 하였다. 관리들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사태 속에서도 모리배들과 결탁하여 치부에 몰두하였으며, 국민들은 국가의 운명에는 하등의 관심도 없이 사치와 방종을 일삼으면서 허송세월을 보내자 더 이상 지켜야 할 가치가 없다는 판단에서 미국은 “반드시 월남을 지킬 것”이라는 허위약속을 뒤로한 채 철수하였다. 미국의 철수는 가능성이 없는 월남을 위하여 더 이상 힘을 소진할 이유도 없었지만, 특히 미국 내의 반전시위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월맹의 선전 선동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 세계 언론인들을 자유자재로 유용하게 이용하였다. 미국 국민들은 안방에서 월남전을 낱낱이 시청할 수 있었다. 특히 야자수 나무에 목이 잘린 미군의 시체가 계속 방영되었다. 미국 국민들은 “왜 우리 청년들이 남의 나라 전쟁에서 저렇게 참혹하게 죽어야 하느냐?”면서 일으키는 반전운동은 미 정부로 하여금 더 이상 버티기에는 한계가 온 것이다. 미군의 철수는 월남의 패망을 가져오는 당연한 지름길이었다. 북한도 이를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그럼에도 월남 국민들은 데모에 미쳐버려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소아병적 시국 사범이 되었고, 정치인들은 계속 바뀌는 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권을 챙기는 재미에 홀려 있었다. 그래서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환호성을 치면서 먹이사슬에 맛 들인 하이에나가 되어버린 것이다. 1967년 9월 3일 국민들이 그렇게 바라던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웬반 티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티우는 새로운 월남을 재건하자면서 마지막 카드로서 거국내각을 제의하였으나 야당 정치인들의 거부로 1975년 4월 21일 하야하고 만다. 그리고 ‘두옹 반 민’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월남 국민들, 정치인들, 데모꾼들이 얼마나 맹아들이었나 하면, 9일 후에 닥칠 패망의 사태도 예측하지 못하였으니 이러고서도 나라라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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