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의 종교계는 토착화된 불교계와 프랑스 식민지 후 전래 된 가톨릭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불교계는 일반 국민들이 절대 다수였기에 그 영향력 또한 막강하였으며, 월맹은 이를 철저히 응용하는 한편 월남 가톨릭 신부들은, 불교계의 승려들이 벌이는 반정부 투쟁이 국민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자 이에 뒤질세라 그들도 반정부 투쟁에 나서 정부를 협공하였다. 1963년 5월 8일은 음력으로 4월 초 팔일이다. 월남도 음력을 쓰는 나라인데 이날은 부처님 오신 날로서 국경일이었다. 월남의 옛 수도인 ‘후에’시는 월남에서 불교 신자가 제일 많은 불교도시다. 이 도시에서 제일 큰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는 불교계의 제2인자인 “띡 트리 꽝” 승려이다. 그는 국경일에 국기를 게양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전 불교 신자들에게 이를 거부하게 하고 불교기를 게양하라고 지시한다. 불교 신자들은 주지승(僧)의 지시에 따라 불교기를 게양하였으나 시 당국에서는 불교기를 철거하고 국기를 게양토록 하자, 꽝 승은 종교 탄압이라고 전 국민에게 호소하고 모든 불교 신자들은 정부에 항의하라는 지시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정부가 하는 짓들이 민심 이반현상을 일으켜 국민들은 시비꺼리가 없나 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이 사건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니다. 대화로서 충분히 타협을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사건 자체를 침소봉대하여 선동하고 있는 불교계의 책동에 기만당한 시민들이 가세하였다.부정부패와 정치인들의 당파싸움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차, 잘 되었다 하여 국민들이 거리에서 나서 극렬한 데모를 전개하자, 제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경찰이 발포하였다. 이에 뒤질세라 대학 교수들, 불교 측 인사들, 학생들, 일부 야당 정치인들이 거리에 나서고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충돌로 이어지면서 마침내 큰 사건이 일어난다. 띡 뜨리 꽝 승은 교구에 소속되어 있는 젊은 승려들에게 항의의 표시로 “분신자살” 할 것을 명령한다. 이로 인하여 전국에서 26명의 승려가 ‘종교 탄압 중지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스스로 몸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자살을 하자, 월남 국민들은 이성을 잃어버린다. 스님 한 사람이 자살하면 국민 백만 명 이상이 반정부로 돌아서 버린다. 월남정부는 계엄령 선포에 이어 사찰습격, 승려들 체포 등 강경책으로 일관하였다. 이에 질세라 월남 불교 신자들의 투쟁도 끝없는 평행선으로 달렸다. 이때 ‘꽝’승은 그의 보좌관 격인 ‘띡 땀 차우’ 승과 함께 미 대사관에 피신하여 숨어 있었다. 정국의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불교도의 지지를 받는 ‘두옹 반 민’ 장군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고딘디엠’ 대통령을 사살하고 정권을 장악한다. 이로써 자유월남은 군사 쿠데타의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서서히 패망의 길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하고 “베트남 정부”가 출범하였다. 수많은 승려와 신부들, 교수들, 학생들, 데모라면 사족을 못 쓰던 ‘데모꾼’들이 모두 체포되어 ‘정치교화소’에 끌려가 죽임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후에시의 주지 ‘띡 트리 꽝’ 승이 국민들 앞에 나타났는데 그는 월맹의 현역 육군 대령이며, 정보 장교로서 월남에 잠입, 불교계에 입문하여 공작금으로 많은 인사들을 포섭하고 탁월한 능력으로 18년 만에 불교계의 제2인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보좌 승이었던 ‘띡 땀 차우’ 승도 월맹 노동당 당원이었고, 꽝 주지승의 오른팔로 역할을 충실히 하였던 불교계 여자 국회의원 ‘큐 몽 뜨’도 월맹 간첩이었으며,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차점으로 낙선한 야당 지도자 ‘쭝 딘 쥬’ 변호사, ‘녹 따 오’ 도지사, ‘창 반 민’ 사이공 경찰장관 등 수많은 정부 관료들이 모두 월맹의 간첩이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