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 기울어진 햇살이 담벼락 모퉁이를 비춘다. 그곳에 경운기 한 대가 녹이 슨 채 서 있다. 비탈을 달려본 지 언제였나, 빗물에 씻기고 바람에 말라 가물거리는 기억이 쿨럭이며 고개를 든다. 가난했던 아버지는 반평생 땅 한 평 가지지 못했다.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운 남의 땅 산비탈에 고구마나 콩을 심어 놓으면 짐승이 제 주인인 듯 먼저 다녀간 적이 숱한 날이었다. 실망한 아버지는 점점 바쁜 게 없었고 산골의 아침 햇살이 방 안으로 들이닥치면 그제야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부지런했던 어머니는 이웃의 논과 밭을 무시로 드나들더니 경운기를 덜컥 샀다. 그리고는 경운기 열쇠를 아버지 손에 맡겼다. 마당에 세워진 경운기를 아버지는 조심스레 시동을 걸었다. 아버지의 심장에 점점 힘이 가해졌다. 햇빛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스타트 레버를 수십 번 돌려 퉁, 퉁, 탕, 탕, 경운기 엔진과 펌프질한 아버지의 심장이 밭으로 나갈 준비를 끝냈다. 아버지는 산과 들을 동네 바깥마당쯤 여기며 날마다 경운기에 시동을 걸었다. 산비탈 밭에서도 하천에서도 아버지의 모습은 헙헙했다. 하루는, 평상시처럼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중이었다. 어머니를 옆에 태우고 오는데 갑자기 성난 경운기가 툴툴거리며 언덕으로 올라갔다. 아버지는 방향을 돌리려 했지만, 거대한 쇳덩어리가 괴성을 지르며 사방으로 거품을 토했다. 순간, 아버지는 경운기 채를 놓쳐버렸다. 거칠게 발버둥 치는 경운기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줄행랑을 쳤다. 어머니는 평생을 같이한 당신이 그럴 수 있냐고 눈물 바람을 일으켰다. 다 늙어서 혼자 살려고 줄행랑치는 꼴이 볼썽사나웠다며 어머니는 안방에 자리를 보존했다. 겁이 많았던 아버지는 말문을 닫은 채 사랑방에 이불을 깔았다. 그 후로 오랫동안 아버지는 대문을 나서지 않았다. 담벼락과 어깨를 나란히 세운 헛간에는 아버지의 경운기가 오도카니 자리를 지켰다. 아버지의 전성시대는 이렇게 끝이 나고 있었다. 헛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경운기와 마루에 쪼그려 앉은 아버지는 많이 닮았다. 나는 해 질 녘의 경운기 한 대와 마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