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일이 다가온다. 세 개의 장면이 떠오른다.이른 아침의 거리!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던 나뭇잎들이 바람 부는 거리에서 날리고 있다. 인적이 많지 않은 거리에서 나뭇잎 쓸고 있는 환경미화원 곁을 종종걸음을 치며 지나가고 있거나 이른 버스를 기다리는 이의 열에 아홉은 고등학생들이다. 학교 안! 8교시 수업을 마치고 저녁 급식을 먹으러 교실을 나서다 창밖을 보면 해가 점점 짧아져서 어느덧 어둠이 몰려와 있다. 학교 식당은 환한 불빛 속에서 학생들의 수근거림과 재잘거림으로 가득차 있다. 이 시간 그래도 조그만 자유라도 누린다. 밤 10시 교문 밖!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교문을 나서면 교문 앞은 부산스럽다.노란 통학용 소형 버스와 그리고 부모님들이 몰고 온 자가용 승용차들로 북적인다. 그 속에서 ‘오늘도 수고했다’는 의미의 손짓과 눈웃음을 친구들과 교차하면서 타고 갈 차를 찾는다. 집이 가까운 학생들은 종종 걸음으로 집을 향한다. 더러는 노란 버스에 실려 학원으로 가기도 한다. 수능이 다가온 늦가을 어느 날. 필자의 35년여 교직 생활을 통해서 각인된 거리와 학교의 세 가지 풍경이다. 3년 동안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야 하고 늦게 잠을 자야하고 20평 사각의 교실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만 하는 우리의 고3학생들이 드디어 그 생활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청소년 시기의 피 끓는 열정도, 신체의 혈기도 오직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 앞에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고교생활, 더 나아가 중학교 생활까지 영향을 미치는 수능과 같은 대학 입시를 위한 시험은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의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고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되어 있다. 그들의 부모 세대는 학력고사가 있었고 더 윗대는 예비고사와 본고사가 있었다. 그 이름만 수학능력고사로 바뀌었을 뿐이다. 대학 입시가 다양화되어 수능의 위력이 예전만큼 못하다 하지만 여전히 모든 이들이 입학하고자 열망하는 대학교의 입시에는 수능이 절대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제 그 D데이가 오고 있다. 학교는 고3 학생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수능 D-000일이라는 간판을 달아둔다. 그곳에 있던 세 자리 숫자가 드디어 한 자리 숫자가 되었다. 학생들은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지만 그 긴장의 깊이가 날로 더 한다. 학교 수업도 이제는 자습 위주다. 일괄적인 강의보다 개별적인 질문과 설명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이 때 수험생에게 뭔가 의미 있는 말을 해 주고 싶지만 마땅히 해줄 말도 없다. ‘시험을 잘 치러라’는 말도 공허하고, ‘진인사대천명’같이 ‘최선을 다하라’는 말도 공허할 뿐이다. 무엇으로 격려하고 무엇으로 위로할 것인가? 승자와 패자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세계에서. 행복이 성적순이 아니라고 오래 전부터 외쳐왔지만 학교는 그리고 사회는 여전히 성적은 행복의 필요조건이라 굳게 믿고 있다. 다양화 사회를 이야기하고 4차 산업시대의 인공지능을 이야기고, 지식의 시대가 가고 역량의 시대가 왔으며, 창의성과 감성의 중요함을 말하지만 여전히 우리 교육은 대학 입시 앞에서 생존을 위한 지식 교육에 머물러 있다. 대학 서열화와 사회 계층의 서열화와 차별 구조는 무디어지기는커녕 더욱 강화되어 가는 느낌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원청기업과 하청기업, 공기업과 사기업뿐만 아니라 직종에 따른 서열화, 한 직장 내에서도 끊임없이 서열화를 매기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서 서열의 윗자리 잡기 시작점이 바로 대학입시다. 욕망을 부추기는 교육, 물질적 욕망의 수단으로 전락한 교육의 총체적 모순의 집합점이 바로 대학입시이며 사회적 계충구조의 시작점이 바로 대학입시다. 서열화, 차별화 된 계층구조를 그대로 둔 채 교육 개혁을 아무리 외쳐도 그것은 공허하다.오늘 이 수능이 주는 이 음울하고 쓸쓸한 가을날에 다가올 우리들의 미래 세대에게 행복한 교육으로 희망을 주는 아름다운 가을로 만들기 위해서 세상을 조금씩 함께 바꾸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고등학교 3학년도 가을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