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에게> 정민호고운 살결 꽃 항아리의훑어 내리는 햇살을 머금고한여름 뜨거운 흙의 생리로 하여꿈을 익히는 햇과일조용히 흔들리는 바람결에도너는 온통 수줍은 이슬로 지고 마는영영 돌아오지 못하는파아란 강물이여.시의 산책로 우리는 대개의 경우 청춘시절에 소녀, 소년들에 대한 추억을 갖고 있다. 그 추억이 어떤 이에게는 단순한 대상으로, 또 어떤 이에게는 풋사랑이나 첫사랑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추억 속의 한 소녀를 떠올리는 시기는 장성한 청장년이 되었을 때와, 중년이 되었을 때, 그리고 비로소 노년에 이르렀을 때 등, 자신의 처지에 따라 각각 다른 감회로 다가올 것이다. 이 시의 화자(話者)는 한 소녀의 청순함을 ‘햇과일’ ‘이슬’ 같은 시어로 드러냈다. 노시인(老詩人)의 통찰이 화자의 입을 통해 소녀의 순수를 말한 것이다. 물론 화자가 시에서 소녀의 청순함만을 그려내려고 한 건 아니다. 마지막 연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파아란 강물이여.’는 좀 더 주의 깊게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소녀는 오로지 화자의 추억 속에서만 소녀일 뿐이며, 언제나 소녀의 상태로 있을 리도 만무하다. 강물이 한 번 흘러가면 되돌아올 수 없듯이, 과거의 어린 소녀도 생존하고 있다면 이미 쇠잔해져 있으리. 결코 어린 소녀로 돌아올 수는 없는 일이다. 흐르는 강물은 흘러가는 시간이다. 흘러간 강물도 흐르기 전에는 소녀처럼, 청춘의 빛을 띤 ‘파아란 강물’이었으리. 이처럼 ‘파아란 강물’에는 생(生)에 대한 시인의 한탄과 비애가 녹녹하게 묻어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