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김경철기자] 팔순을 훌쩍 뛰어넘은 나이지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유족의 아픔을 달래주기 위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위령사업 등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는 이가 있어 주위로부터 칭송이 자자하다.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전국유족회 경주지회 김하종(83) 회장이 그 주인공.(사)한국전쟁 유족회 이사이기도 한 김 회장은 오는 7일 경주시 노서동 소재 웨딩파티엘에서 열리는 ‘제7회 민간인 희생자 추모행사’를 앞두고 행사취지를 알리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등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그의 고향인 월성군(현 경주시 외곽지역, 한때 경주군) 내남면은 45년 광복 직후부터 우익청년단체가 자행한 민간인 학살로 얼룩진 비극의 역사 바로 그 현장.1946년 10월 1일 일부 좌익세력들이 월성군 일대를 습격했다. 이로 인해 경찰서가 잠시 좌익세력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가옥 5채가 전소됐으며 좌우 쌍방 5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를 ‘10·1사건’이라고 한다.이 사건에 연루된 좌익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경찰에 협조적인 우익단체의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이협우(1921년생, 작고)는 내남면에서 우익청년단체의 중심에 서게 됐다.그 당시 경찰은 부족한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민보단이라는 준군사조직을 설립했다. 민보단 정원은 보통 20∼30명으로 단원은 경찰서장이 추천하는 사람으로 구성된다. 또한 민보단에게는 총과 무기가 지급됐다. 1949년 내남면 청년단장 이협우는 내남면 민보단장직을 겸했다.이씨 일당은 49년 7월7일(음력) 심야에 잠을 자고 있던 김 회장의 일가친척 22명을 총살했다. 그러나 경찰은 청년단이 공비토벌을 돕는 터라 수수방관했다. 많은 사람을 죽여도 ‘빨갱이를 죽였다’고 하면 넘어가던 시대였다. 학살자 이씨는 ‘청년단에 비협조적이다’는 등의 이유로 좌익을 소탕하기 보다는 사적인 감정으로 학살을 자행한 인물이다.친족이 몰살당한 줄 모르고 사체를 매장하러 갔던 김봉수(김 회장의 부친)씨는 총 맞았을 때 흘린 피 묻은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혀 매장하려다 민보단원인 감시자들이 그렇게 하면 매장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몽둥이로 부친을 때려 중상을 입혔다.이씨 일당은 48년부터 50년 8월까지 169명을 학살했다. 물론 이 169명은 4·19혁명 이후 구성된 유족회에 공식 신고 된 숫자이고 실제는 내남면민 200명 이상이 피살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이씨는 이후 자유당의 3선 국회의원까지 지냈지만 4·19혁명 이후 살인·방화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금전으로 매수된 일부 유족들의 허위 증언으로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해방 후 굴곡진 한국사를 몸소 체험한 김씨는 60년 9월 5일 경주시 노동동 241번지(중앙파출소 2층)에 경주지구 양민피학살자유족회 사무실을 개설해 회장에 피선됐다.이때부터 그는 피학살자 신고 및 실태조사, 사건진상규명서 작성 등 피학살자 유족 관련 업무를 도맡다시피 했으며 월성군 지역의 피학살자 860여명의 신청을 접수받아 양민피학살자의 원혼묘 건립, 호적정리 등의 업무를 꼼꼼히 챙겼다.그는 60년 11월 13일 경주시 교육장과 계림초등학교 교장의 승낙을 득하고 경주경찰서장의 집회허가를 받아 피학살자유족을 비롯해 경주시민과 월성군민 등 4천여명 운집한 가운데 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경주지구 양민피학살자 합동위령제를 거행하기에 이르렀다.5.16쿠데타 이후 이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혁명재판소는 62년 1월 29일 김하종(당시 28세)씨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6·25전쟁 때 우리 국군과 경찰이 선량한 국민을 살해한 것처럼 왜곡하고 위령탑 건립 등을 주장해 북한 괴뢰를 찬양 동조했다”는 혐의.그는 “가족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혁명재판소 제3심판부는 이틀 후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민정이양 때 정치범특별사면조치로 2년을 복역하고 사면돼 고향으로 돌아왔다.그 후에도 경찰의 감시가 이어졌다. 취업할 수 없어 농사를 짓고 살다가 역사를 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2세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70년 11월 경주시 구정동 소재 불국사실업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했으나 사회안전보장법이란 악법에 의해 사찰대상자로 낙인이 찍혀 교직생활이나 사생활에 많은 제약과 고통을 받아야 했다.양민피학살자유족들도 김씨처럼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는 연좌제에 시달려야 했다. 형사처벌을 받고 나서도 신원조회로 인해 사회활동에서 불이익을 당했다.그는 2세 교육에 대한 남다른 열정으로 75년 3월 경주시 시래동 소재 경주여자상업고등학교(현 경주여자정보고) 초대교장으로 부임했으며 84년 4월 영천시 화룡동 소재 영도고등학교(현 선화여고)를 설립했으나 민간인 희생자 유족들의 권익을 대변하는 활동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과로 경주출신 정수성 국회의원은 올 6월 ‘경주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특별 법안’을 동료의원 10명과 함께 대표 발의했고 최양식 경주시장도 올 8월 ‘경주시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위령사업 등 지원조례안’을 제출해 경주시의회가 9월 원안 가결했다.김하종 회장은 “우리 유족은 천인공노할 비참했던 경주지역에서의 860여명의 대학살의 진상을 만 천하에 읍소함으로써 통분과 억울함이 천년을 두고 울어 주어도 좀처럼 풀리지 않을 것이다”며 “내 사랑하는 고향산천 조국 땅에서 천추의 원한을 남겨두고 집단 암매장된 채 백골이 된 내 부모·형제·자매들의 원혼들이 구천에서 나마 영민할 수 있게 위무하는 것은 우리들의 의무이자 도리이다”고 토로했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