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강동진기자] 석가모니탄신일이 한참 지났는데 웬 스님 얘기냐고 반문하는 독자들도 있으리라 생각한다. 오늘은 한국 불교 현대사에서 가장 추앙받는 스님으로 ‘간화선’을 이으신 대선사 두 분과의 인연과 삶에 대해 간략하게 전하려고 한다. 먼저 기자는 불교 신자이긴 하지만 불교에 대한 지식과 예법, 용어에 대해 눈도 제대로 못 뜬 초보 불자이니 독자들과 불자들에게 양해를 구한다.
저는 2015년 8월 18일 오후 한국 불교계의 대부이자, 대한불교 조계종 ‘진제 종정예하’ 스님을 난생 처음 알현했다.
보통은 종정 스님을 먼발치서 뵙기도 쉬운 일이 아닌데 불교계에 가장 큰 스님과 인터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다. 예상하지도 못한 접견이라서 어안이 벙벙하고 당혹스러웠다.
더욱이 당신의 승려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신 대선사의 얘기를 들러주는 자리에서 글로 적는다는 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내 생애 가장 영광스러운 인터뷰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 하기로 했다.
이런 게 인연인가 싶다.
이날 인터뷰에는 천기화 한동알앤씨그룹 회장(본지 회장)과 경주 산내면 심원사 주지 신행 스님(종정 스님 보좌관)과 함께 종정 스님이 계신다는 해운대 ‘해운정사’로 향했다.
가는 길 내내 기대와 걱정, 들뜬 마음이 교차했다.
출발 전에 진제 종정 스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고 좀 더 상세한 정보를 가지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20세에 석우선사를 은사로 출가, 33세(1967년)에 향곡선사에게 깨달음을 인가받아 경허→혜월→운봉→향곡 대선사로 이어져 내려오는 부처님의 ‘석가여래부촉법’(제 1세 법손, 마하가섭존자)의 맥을 이은 큰 스님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즉, 진제 종정예하는 향곡대선사로부터 ‘진제’라는 호와 ‘전법게’를 이어 받은 부촉법의 ‘제 79대 법손’이다.
진제 종정 스님은 석가모니께서 인류 중생들을 구제키 위해 말씀하신 진리(법)의 정통 법통을 잇고 있는 한국불교에서 가장 상징적 인물임을 깨우치게 됐다.
두 시간여를 달려 해운대 초고층 신도시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해운정사에 도착했다.
도심의 산기슭에 안담하고 정갈하게 자리 잡은 해운정사 경내로 들어서니 뒤숭숭하던 마음이 그냥 평안해졌다.
안내를 받아 조심스럽게 종정예하 스님이 계시는 경내 집무실로 들어서 천기화 회장님과 신행 스님을 따라 삼배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종정 스님의 온화한 얼굴을 바라보는데도 그분의 눈빛과 자세는 사자가 욕심을 비우고 앉자 있는 듯 했다.
내 마음속과 과거사를 다 아는 것 같아 자연히 고개가 숙여졌다.
잠시 후 마음속에 가득 찼던 ‘탐진치’가 다 날아간 듯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냥 즐겁고 편안하고 기뻤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떨려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라고 운을 뗐다.
말씀드리기가 어려워서 머뭇거리다, 먼저 포항과의 인연에 대해 여쭈었다.
종정예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에게 법(진리)을 물려준 전법스승이신 ‘향곡대선사’가 영일군 신광면 토성리 분이었다고 하셨다.
그분은 내원정사에서 부처님의 진리를 깨달으셨는데 운봉대선사가 향곡 선사에게 부처님의 진리의 법통을 넘겨준 분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향곡 대선사는 우리가 잘 아는 성철 스님과 가장 가까웠던 도반(친구)으로 후배 스님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가신 한국 현대 불교계의 참거목이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포항이 낳은 부처님과 같으신 분’이라고 역설하셨다.
종정예하께서는 큰스님(향곡대선사)은 고향이야기를 가끔 하셨다고 했다.
특히 말년에는 혼자서 몰래 자주 다녀오시기도 하셨다고 한다.
고향이야기에서 빼놓지 않고 드는 건 ‘비학산’ 자랑이었다고 하셨다.
“우리 고향에 비학산이라고 있는데, 학이 날아가는 형상이라 카이. 그래서 이전부터 비학산은 명산이라 우리 동네서 큰 인물이 난다 캤어.”
동네어른들은 이 산 아래에서 큰 인물이 둘 나올 거라고 말해 어린 마음에도 그런 말을 들을 적마다 어떤 인물이 날지 매우 궁금해 하셨다고 회상을 했다.
확언하건데 비학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난 큰 인물 중 한 분이 곧 향곡대선사임에 틀림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스승은 종교와 종파의 경계가 없는 분이셨다”며 “늘 모든 이들이 부처님의 법을 익혀 싸우지 않고 평화롭게 살기를 서원하셨다”고 전해 주셨다.
종정 스님은 몇 년 전 향곡대선사의 생가를 가 보셨다는데 “옛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기와집도 폐가가 되어 있더라”하시며 “스승의 생가가 빨리 복원이 되었으면 ~~~”라며 여생의 작은 소망이라고 하셨다.
“그 기와집도 곧 쓰러지게 생겼다”라며 매우 안타까워 하셨다.
이어 종정스님은 생가를 잘 복원해서 유적지화하는 것이 불교계뿐만 아니라 포항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말씀을 들은 저는 생애 가장 큰 기쁨이요 임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나는 한 시간 정도의 인터뷰 동안 몸이 아파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쳤으나 미동 없이 꼿꼿이 앉자 말씀을 하시는 종정예하의 모습에 더 놀랐다. 인터뷰를 마치고 삼배를 올린 후 일어섰다.
대청마루까지 나오셔서 배웅을 해주신 종정예하께 최고의 예로 작별인사를 드렸다.
종정 스님을 처음 뵙던 이튿날 나는 신광 토성리에 위치한 향곡대선사의 생가를 단번에 찾았다.
한 사람을 만나 생가를 찾았는데, 신통하게도 그 사람이 몇 년 동안 살던 집이란다. 현재 그 집을 관리하는 사람은 내 친구다.
60평 남짓한 낡은 기와집. 담쟁이 넝쿨이 벽에 마구 달라붙어 더 처량해 보였다.
곧 쓰러질 것 같은 담장, 마당은 잡초만 무성하다.
당시로선 집주인이 목수여서 꽤 잘 지은 집이라고 친구가 귀띔해줬다.
주인 없는 폐가는 한국 현대불교의 거목이 태어났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그저 가난하게 살았을 어느 촌부의 집인 듯했다.
현재 집주인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고 집을 나서는데 여러 가지 의문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집이 머지 많아 큰 인물이 없다는 포항과 지역 불교계의 이미지 제고에 가장 큰 공헌을 할 인물이 출생한 집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으로 보여 기뻤다.
진제 종정예하를 비롯한 많은 스님, 불자 시민의 소망인 향곡대선사의 생가가 올 안에 복원되어 불자들의 성지가 되고, 많은 시민들이 찾는 포항지역 정신문화의 유적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향곡대선사 약력.
1912년: 경북 영일군(포항시) 신광면 토성리에서 출생.
1927년: 경남 양산 내원사에 입산, 성월스님을 은사로 득도. 법명은 혜림(蕙林).
1944년 8월: 운봉대선사으로부터 깨침을 인가받고 전법게를 전수(석가여래부촉법 제78대 법손)
1947년: 성철스님과 도반으로 함께 봉암사 결사 참여, 경남 기장군에 있는 묘관음사에 주석하며 후학들을 양성
1978년: 음력 12월 18일 입적. 세수 67세 법랍 50세.
◆석가여래부촉법 :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맥은 선법의 진수를 제자에게 전하는 것으로서, 스승은 법맥을 전할 참된 제자를 구하여야만 그 임무를 다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스승은 제자에게 게송으로서 법을 전하는데 이를 가리켜 ‘전법게’라고 한다.
역대 법맥은 서역 천축(인도)의 석가여래부촉법 제 1세 법손 마하가섭존자로부터 제 2세 아난다존자에서 중국의 초조이신 제 28세 보리 달마대사로부터 제 56세 석옥청공 대선사에 이르기까지 전법게가 이어졌다.
이어서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고려말엽 태고 보우선사께서 중국에 가셔서 불조혜명을 이어 해동(한국)의 종조가 됐다.
근래 한국불교의 석가여래부촉법의 법맥은 경허(제 75대)?혜월(제 76대)ㆍ운봉(제 77대)ㆍ향곡 대선사(제 78대)가 이었다.
현재는 진제 종정스님이 제79대 법손으로 그 맥을 잇고 있다.
◆간화선이란? 불교에서의 선(禪) 수행방법 중 화두(話頭)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이며 일명 화두법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 불교 역사 속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선수행법이다.
이에 대비되는 수행방법엔 묵도법이 있다.
한국 불교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승려들은 대부분 이 수행을 한 분들이다.
진제 종정예하께서도 이 수행법을 통해 진리를 깨달으시고 한국불교의 위상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으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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