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매일신문=강동진기자]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선조들은 일본으로부터 조국을 되찾기 위해 36년 동안 목숨을 거는 독립운동을 벌였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 날을 위해 피와 죽음으로 일제와 맞싸워 독립을 쟁취했다.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은 목숨을 받친 순국선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절대로 이분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목숨을 걸고 싸운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공적이 잘 알려지지 않아 뒤늦게 건국 훈장을 받으신 분들이 많다.
오늘은 조국광복을 위해 특별하고도 기구한 인생을 살다 가신 독립투사 한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요즘은 잘 쓰지 않는 단어지만 한자어로 `파락호` 라는 말이 있다.
이 뜻은 양반집 자손으로 태어나 노름이나 축첩 등으로 재산을 몽땅 털어먹은 난봉꾼을 의미하는 말이다.
일제 강점기 때 안동 사람으로 노름판이란 노름판은 모조리 돌며 재산을 탕진한 조선의 으뜸가는 파락호가 있었다.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 선생의 13대 종손인 여현 김용환(1887~1946)이다. 그의 본관은 의성이다.
당시 안동에선 그를 이상한 노름꾼으로 불렀다고 한다.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모두 배팅하던 그는 돈을 따면 조용히 돌아가고, 잃게 되면 한 마디 고함을 질렀다.
“새벽 몽둥이야!”라고 외치면 그 신호를 시작으로 몽둥이를 든 그의 수하 수명이 현장을 덮치면 그는 판돈을 챙겨 유유히 사라졌다고 한다.
한번은 무남독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보낸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가져가 노름으로 탕진했다고 전한다.
결국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 수 없다며 친정 큰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가슴 아픈 일화도 있다.
그의 행동이 이 정도이니 주위에선 그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을게 뻔하다.
그는 대대로 이어오던 종갓집과 논, 밭 등 18여만 평(현재 시가 200억 원 상당)의 재산을 노름으로 모두 탕진하고 해방 다음 해 1946년 4월 26일 파란문장했던 생을 마감했다.
훗날 그의 기인한 행동과 비밀, 노름으로 탕진한 전 재산은 사실 만주 독립군의 지원금으로 보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동아일보 1922년 12월 30일자 기사에 의하면 김용환 선생은 독립후원의용단 경북단장 신태식 선생 밑 조직원으로서 경북서기로 활동한 인물로 기사화돼 있다.
노름꾼으로 위장해 가족까지 속이며 원망 받던 김용환이 독립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용환의 할아버지인 독립운동가 김흥락이 사촌인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 발각, 종가 마당에서 왜경 앞에 무릎을 꿇어 치욕을 당한 할아버지 때문이다.
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파락호라는 불명예와 가족의 원망을 감수한 그가 숨을 거두기 전, 그의 오랜 독립운동가 친구가 “여현이 이제는 말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라고 권유하자,
하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마지막 대답은 “선비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말게나~~~”하곤 온전한 사진 한 장도 남겨놓지 않고 며칠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애국심의 무게에 한 없이 고개가 숙여진다.
훗날 밝혀진 비밀이지만 종손 김용환이 노름으로 탕진한 줄만 알았던 종가 재산은 고스란히 만주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내졌다.
노름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한 위장술이었다.
그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철저히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정말 위대한 인물이었으나 해방 50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독립운동사는 밝혀졌다.
광복 50주년, 사후 49년이 1995년이 돼서야 김용환은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됐으며 지금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안동시 임하면)에 선생의 일대기가 자세히 전시돼 있다.
그의 외동딸 김후웅 여사는 광복 50주년에 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서 훈장을 받게 됐다는 감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고 아버지를 그리며 지은 추모 시를 지었다.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앞 중략)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 서씨 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 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맡긴 그 돈마저 가져가서 독립자금 보탰는지.
우리 아베 기다리며 몇 차례 물리다가 큰 어메 쓰던 헌 농 신행 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어느 무당이 귀신 붙어왔다 하며 강변 빈터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 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이 모든 것 우리 아베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자금 모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중략)
자랑스런 우리 아베 학봉 종손 참봉 나으리 !
이 글은 김후웅 여사가 아버지께서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친정 조카( 학봉 15대 종손 김종길)에게 보낸 시조 형식의 편지 글이다.
파락호 아버지로 인해 평생 고개도 들지 못했으나 노년에 아버지의 훌륭함을 알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쓴 시가 어느 명시보다 나의 가슴을 때린다.
무남독녀 외동딸 혼수 살 돈까지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낸 매정했던 아버지를 둔 김 여사와 그 후손들이 오늘따라 참 부럽다.
기자에게도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죄송하다.
특히, 김용환 가문에는 학봉 10대 종손 김진화(김용환의 증조부) 선생을 기준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만 친족과 외족 합쳐서 12명이나 되는 한국 최고의 독립운동 명문가다.
조부 김흥락을 비롯한 김회락, 김익모, 김연환, 김연식 등 친족 6명과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파리장서를 주도한 이중업, 유연박, 이만도, 이동흠 등 외족 6명이 독립운동가였다.
지금도 친손뿐 아니라 외손들도 독립운동 명문가 후손답게 독립정신 함양과 선비정신 고양 등으로 보람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친손자 김종길 선생은 안동시 도산에 있는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원장으로, 외손자 서점 선생은 청송의 ‘화전등 항일의병기념공원’ 관장을 맡아 나라사랑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전 재산을 내놓고 모자라 외동딸 혼수까지 조국을 위해 쓰신 김용환 지사 같은 분들이 계셨기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대국 대한민국이 존재한다는 걸 결코 잊어선 안된다.
우리도 순국선열들의 위대한 얼을 이어받아 더욱 찬란한 도약의 역사를 쓸 수 있는 선조가 되도록 다들 노력하자.
김용환 지사의 손자인 김종길, 서점 선생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재산과 목숨을 받친 분들이 생각보다 많은데 이런 사실을 아는 국민들이 점점 적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며 “정부와 국민들은 순국선열들의 애국심과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 정신을 함양하고 계승하는데 힘을 더 써야 된다”라고 강조했다 .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