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는 세상을 바꾸어 놓았다. 뱃길 따라 형성되었던 도시들을 내륙에 뿌려놓은 것도 철도의 위력이고, 기차시간을 정확히 맞추려고 시계탑 사이에 신호를 주고받는 수단으로 발명된 텔레그램은 오늘날 정보통신의 시초가 되었다. 이뿐인가? 스위스 베른의 특허청에 근무하던 아인슈타인은 정거장 마다 같은 시간을 갖게해야하는 문제에서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는 행운을 얻었다. 진화론의 아버지 다윈은 철도에 주식추자를 해서 얻은 돈으로 직업없이 많은 자녀를 키우고 평생 독립적인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철도는 그저 어는 역에서 어느 역으로 달려가는 수송수단 이상임에 틀림없다.
드디어 포항에 고속철도인 KTX가 들어왔다. 마침 서울 출장이 있어 KTX를 탈 기회가 있었다. 동그랗고 아담한 포항역사에서 봄날의 햇살을 받고 승객을 기다리던 국산열차인 산천을 탔다. 산천은 한참을 달려 드디어 동대구에 도착했다. 동대구역에서 마산쪽에서 올라온 또다른 산천을 붙이더니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 산천은 대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몇 개의 역을 경유했다. 서울역은 종착역이 아니고 더 달려갈 길이 있었다. 포항에서 서울역까지 대략 두 시간 사십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이것이 어딘가 하는 감탄이 터져 나오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슬금슬금 계산기가 두들겨지고 있었다. 동대구까지 30분에만 달려주면 동대구에서 서울역은 1시간 50분이내 이니 20분은 절약할 수 있겠다하는 생각, 강남에 볼일 이 있는 사람은 서울역에서 강남까지 대략 한시간 걸리니 지금 대로 하면 3시간 40분이 걸리니 고속버스 타고 가는 것하고 별 차이 안 나는 것 같다는 생각까지 여러 생각이 떠올랐다. 고속철라면 적어도 서울까지 두시간 15분 이내로 돌파하는 스프린터 기질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KTX는 실로 많은 개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포항 발 KTX는 서울 역에서 멈추는 것 보다 행신이나 인천공항까지 달려가고자 하는 질주 본능을 갖고 있고 마산창원에서 올라오는 열차를 통합하는 융합능력을 갖고 있으며, 중간에 무시당하는 여러 역에 승객을 내려주는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산 고속철 산천을 투입하는 애국심까지 실로 엄청난 개념의 집합체이다. 이런 개념들로 몇십 분이 늦어지는 것을 비난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니 포항 발 KTX가 정말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항발 KTX를 꾸짖기 전에 우선 내 인생을 돌아보면 너무나 종종 수많은 개념들 때문에 원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방황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정부도 개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임기가 지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포항 발 KTX가 늦어지도록 하는 수많은 개념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목적지에 도달한다. 목적지를 넘어 행신이나 인천공항까지 달리는 질주본능, 창원에서 달려온 다른 기차와 함께 달리는 융합력과 한 방울의 전기도 아끼는 알뜰함, 소외된 여러 역에 사람을 내려주는 세심한 배려, 국산품 산천을 애용하는 애국심에 이르는 수많은 개념을 한 몸에 짊어졌건만, 포항 발 KTX는 개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고 조금 늦더라도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내고 만다. 이토록 위대한 포항발 KTX를 탈 때마다 이 정신을 배우고 또 배울 일이다.
이재영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