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질 뻔했던 우리소리 동부민요를 보존, 전승하고 보급과 후진양성을 위해 온 힘을 쏟아온 박수관(59) 명창은 지금도 그를 필요로 한다면 국내든 해외든 가리지 않고 곧장 달려가는 진정한 소리꾼이다. 박 명창은 동부민요를 보존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15년 전인 지난 99년 국립공원인 함월산 자락 경주시 보덕동 황용골에 터를 잡았다. 숱한 난관을 뚫고 5년 만에 대한민국동부민요보존회수련원을 건립했다. 경주지역에서 가장 오지마을인 이곳에는 강의실과 자료실을 비롯해 공연장, 관람석, 숙박시설, 수련시설 등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전통한옥으로 조성해 수려한 주변경관과 잘 어울리고 있다. ‘베를린 2011 국제델픽예술영화제’에서 대상 수상작인 ‘메나리’의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은 본격적인 가을철을 맞아 형형색색으로 물들고 있는 단풍과 함께 억새와 국화꽃 등이 장관을 연출하면서 주위의 기암괴석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명당이다. 동부민요를 보존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수련원을 건립해 후학을 양성하는데 온 정열을 바치고 있는 박 명창은 지난달 26일 이곳에서 ‘제5회 대한민국동부민요전국경창대회’를 개최했다. 국악인, 시민 등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된 이날 행사 참석자들은 박 명창의 상여소리, 장타령, 치이야 칭칭나네 등의 동부민요를 듣고 “우리민족 정서인 한과 멋을 혼을 담아 표현한 훌륭한 소리였다”고 극찬을 하면서 치이야 칭칭나네 가락이 울려 퍼질 때는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즐거워했다. 정선아리랑, 상주아리랑, 상주함창가, 경상도 상여소리, 장타령, 치이야 칭칭나네 등 동부민요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에서 부르던 소리로 호방하면서도 민초의 애환을 잘 표현하고 있는 우리민족의 소리다. 강원도나 함경도의 민요는 탄식이나 애원조의 노래가 많고 경상도의 민요는 꿋꿋하고 씩씩한 느낌을 주는 ‘메나리’조라는 창조를 고집하는 것이 특징이다. 박 명창은 “함경도의 대표적인 민요 신고산타령,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경상도의 메나리조 등의 음계를 다 소화하고 부를 수 있어야 제대로 동부민요 소리를 낼 수 있다”며 “3도의 소리를 아우를 수 있는 진정한 소리꾼이 나밖에 없다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후진양성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했다. 현재 그의 제자들은 강원도와 경상도는 물론이고 전라도와 제주도 등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러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해외를 포함해 100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 김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시골장터에서 각설이패의 타령, 초상집에서 상여꾼의 소리를 흉내 내며 전통민요 가락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부산 유학시절인 초등학교 6학년 때 우연히 부산진역 앞에서 김로인(金路人)이라는 동부민요의 달인을 만나 소리의 기본기를 배웠고 악보 없이 스승의 소리를 듣고 따라하는 방식으로 동부민요를 전수받을 수 있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김로인 스승의 유일한 제자로 동부민요를 전수받은 후 독학으로 닦은 실력을 가지고 1999년 한 해 동안 전국 국악대회 3곳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존재가 온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1999년 국악계에 일대 사건이 벌어졌다. ‘무명’의 인물이 등장해 3월 ‘제1회 상주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상인 문화관광부 장관상, 같은 해 5월 ‘제2회 남도민요 전국경창대회’ 일반부 대상인 국무총리상, 10월에는 ‘제7회 서울 전통공연예술경연대회’ 종합대상인 대통령상을 받았다. 동부민요라는, 그때까지만 해도 잘 알려지지 않은 소리를 갖고 국악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주인공이 바로 박수관이다. 그 당시 남도ㆍ서도ㆍ경기민요는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동부민요는 전수자도 이수자도 거의 없는 명맥이 끊길 뻔한 우리민요였다. 20대 초반부터 머리가 복잡하거나 가슴이 답답해지면 짬이 날 때마다 무작정 설악산, 지리산 등 전국의 명산을 모조리 섭렵했다. 함월산 자락 황성골을 대면한 순간 “바로 여기가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곳이다”라는 탄성과 함께 그의 23년간 명산순례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명산순례는 재충전의 의미도 있지만 갈구했던 것은 동부민요를 보존, 전승하고 보급과 후진양성을 위한 둥지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는 지난 96년 한양대학교 대학원 산업공학과 졸업하면서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한데 이어 그해 명예어문학박사(러시아 이르쿠츠크 국립사범종합대학교), 2000년 명예매개음악학박사(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글링카 국립음악원) 등 각기 다른 3분야의 박사학위 소유자로 정보기술 분야 설비제작업체 갑우정밀 대표이사로서 육군3사관학교 객원교수(99년), 환경부 환경홍보대사(2005년), 대구예술대학교 한국음악과 석좌교수(2010년), 아프리카 왕족포럼 명예대사(2010년)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문화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국제델픽위원회(IDC) 상임위원인 그는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세계전통음악가 인명사전(IRMA) 등재된 인물로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러시아 타워상과 미국 대통령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유일한 취미요 특기인 동부민요 부르기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직위든 항상 곁에서 그를 지켜준 버팀목이었다. 슬펐을 때 위무해주고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힘이 돼 줬으며 기뻤을 때 흥을 돋궈준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소리가 그냥 좋았습니다. 하지만 직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예술로 먹고 살려고 하면 예술에 대한 열정이 식고 신명이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했다. 이제부터는 동부민요 보급과 후진양성을 위해 모든 걸 바치겠다고 밝혔다. 현재 대한민국동부민요보존회장직과 글링카 국립음악원 명예교수직만 갖고 있다는 그는 앞으로도 영원한 명창으로 불리길 원한다. 공학도이면서 소리꾼이고 기계분야 명장이면서 명창인 그는 “예술과 기술의 공통점은 반복된 숙련에서 얻어지는 결과의 산물로 한 뿌리에서 뻗은 가지와 같다”며 “예술의 부드러움과 기술의 딱딱함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면 예술과 기술이 모두 한 단계 더 높은 경지로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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