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문득 공포를 느끼는 지점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 지점은 대개 친숙하지만 잘 들여다보지 않았던 미지의 존재, 혹은 공간일 것이다.
그 익숙함이 낯설음으로 다가올 때 일상은 공포로 치환된다. 도심 속 189만 개 이상의 맨홀 역시 일상에서 오는 공포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발밑의 맨홀은 영화의 흥미로운 소재가 된다. 영화 ‘맨홀’의 핵심적인 테마는 바로 일상을 가장한 맨홀의 공포에 있다.
‘맨홀’(감독 신재영)은 거미줄처럼 얽힌 지하 세계를 지배하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그 속으로 납치된 자들의 목숨을 건 생존게임을 그린 작품이다. 주연배우 정유미와 서울예대 동기인 신재영 감독이 연출을 맡은 첫 상업 영화이기도 하다. 정유미 외에 정경호, 김새론이 출연한다. 정유미는 이번 영화로 첫 스릴러 장르에 도전했고 정경호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 역으로, 김새론은 청각장애인 역으로 각각 연기 변신에 나섰다.
‘맨홀’은 추격 스릴러 장르답게 수철(정경호 분)과 연서(정유미 분), 수정(김새론 분) 자매의 끈질긴 추격전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수철은 동생을 찾아 맨홀을 헤매는 연서를 CCTV로 지켜보며 방임하는데 이는 수철이 늘 시청하고 있는 ‘동물의 왕국’ 속 약육강식의 생태계와 종종 중첩된다.
먹이를 노리며 찰나를 기다리는 사자의 모습과 한 순간 덜미를 잡히는 약자의 모습과 흡사하다. 탈출구를 발견하지만 수철의 덫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들 자매의 모습은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화가 담아낸 공간들이다. 실제 맨홀의 내부를 되살린 듯 공을 들인 세트가 돋보인다.
괴기스러운 느낌뿐만 아니라 축축함이 느껴지는 질감이 고스란히 구현됐다. 물이 흐르는 하수도 역시 미술팀의 심혈을 기울인 공정 끝에 탄생한 세트다.
제작진은 실제 하수도 도면과 해외 하수도 사진을 참고해 리얼리티를 높였다. 주연배우들 역시 연기 몰입에 실제와 같은 세트가 큰 도움이 됐다고 입을 모아 말했을 만큼 공간이 이끌어내는 몰입도가 상당하다. 배우들의 열연도 돋보인다. 정경호는 무자비한 살인마로 등장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족에 대한 상처가 있는 인물로 분했다. 사람에 대한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 찬 수철 역을 위해 감정 소모를 감행하는 정경호의 연기가 시선을 끈다. 정유미 역시 동생을 찾는 절박한 심정을 연기하며 감정 이입의 여지를 충분히 열어둔다. 김새론은 첫 수화연기 도전이었음에도 불구,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인다. 신재영 감독이 시도한 영화의 실험적인 요소들도 눈에 띈다. 대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영화 속 대사 분량은 A4용지 두 장 미만이다. 수철의 존재가 공포로 옥죄어 오는 공간에서 각 시퀀스는 극 중 인물들의 비명소리로 주로 채워진다.
‘맨홀’은 신선한 소재, 새로운 영화적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연서와 수정 자매에 대한 서사가 집중적으로 잔인한 지하세계와 평온한 지상세계의 대비가 보다 확연하게 드러났다면 영화의 내부적인 메시지가 크게 와 닿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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