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덴마크의 처지는 참혹했다. 영국의 침공에 해상무역이 멈춰 섰고 국립은행이 파산했다.
현재 영토의 8배에 가까운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빼앗겼다. 그로부터 50년 뒤 국토의 3분의 1에 이르는 곡창지대를 독일에 내줘야 했다.
사나운 날씨와 황무지만 남았다. 그 후 한 세기 반, 덴마크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됐다. 2013년 세계 행복보고서에서 행복지수 1위 국가에 올랐다.
덴마크는 대학까지 교육비와 병원비가 무료이고 실업급여가 월급 비슷한 수준으로 사회안전망이 세계 최고수준이다.
덴마크 사람들의 행복비결은 자기인생을 어떻게 살지를 여유를 두고 스스로 선택하고 국가와 사회가 그런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덴마크에서 직장인은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고 학생은 성적을 위해 공부하지 않는다.
평직원의 기업 이사회 참여가 대부분 보장되고 해고 되더라도 보조금이 나오며 재취업의 길도 여러 갈래다.
학교에선 성적으로 서열을 가리지 않고 고교진학 전 1년간 인생설계를 하는 교육프로그램이 있다. 빈부격차가 적고 직업에 관계없이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뿌리내려 있다.
더불어 잘 살게 된 문화를 꽃피운 것은 신뢰다. 국민은 정부를 믿고 이웃이 서로 믿는다.
세금이 허투루 쓰이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으니 복지가 탄탄하다. 연대가 단단하니 협동조합이 강해지고 노사관계가 평화로워 졌고 경제 또한 따라서 성장했다.
두 사람만 모여도 협동조합을 만든다는 덴마크엔 놀랍게도 아직 협동조합이 없다. 신뢰가 있기에 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법 없이 사는 국민이다.
덴마크 특유의 신뢰와 연대의 문화는 19세기말 싹텄다. 당시의 참화를 딛고 일어나기 위해 민족의 지도자들이 시작한 교육ㆍ노동ㆍ개간ㆍ청렴운동이 성공을 거두면서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은 국민들께 어떻게 비치고 있으며 국민은 지금 어떤 사고와 생각으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미국 의회에서는 대선에서 패배한 당의 상원의원이 반대당 소속 대통령의 국정연설에 기립박수를 보내는 장면을 언론을 통해 흔히 볼 수 있다.
국리민복을 위해서는 여야를 초월해 한 목소리를 내는 선진정치의 모습이다. 상대 당과 정적에 대해서 손톱만큼의 배려나 이해조차 외면하는 오늘날 우리 정치판의 현주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툭하면 망국(亡國)의 전형이라 매도하던 조선시대의 당쟁도 작금의 우리 정치판 같이 타락하지는 않았다.
오늘의 막가파식 정쟁은 멀쩡하고 순수한 국민까지 끌어들여 욕보이고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성군 세종대왕이 내려다보고 있는 광화문 광장의 모습이 그 적나라한 현장이다. 소통과 화합과 평화의 상징이어야 할 공간이 단절과 대립의 이전투구의 장이 되고 말았다.
보수와 진보가, 단식투쟁과 폭식 농성이 같은 공간에서 대치한 가운데 막말과 삿대질을 주고받으며 편견과 증오를 확산시키고 있다.
이를 중재하고 아울러야 할 정치는 그들이 앞장서 부추기고 이를 바라보는 민심은 한숨 속에 서글퍼만 진다.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는커녕 정치력을 상실하고 소인배적 정치인의 행태는 실망을 넘어 역겹기까지 하다.
진영논리와 당파적 이해에 급급한 정치부재가 국회무용론과 국회 해산론으로 비화하고 있는 판국이다.
모두가 제 목소리를 높이고 남의 얘기는 들은 채도 하지 않고 나라는 위기인데 정치권은 한가하게 개점휴업이니 국민을 태운 대한민국호는 지금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거리마다 광장마다 최소한의 양식과 예의마저 내 팽개쳐진 야만이 난무하고 있어도 이를 나무라고 타이르고 지도해 줄 어른 한사람, 지도자 한사람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 도대체 모두가 패자요 억울한 사람 성난 목소리뿐인 우리사회의 끝은 과연 어디쯤일까?
불과 몇 십 킬로미터 지척에 미사일의 화구는 우리를 겨냥하고 있는데도 조선의 당쟁보다 못한 상극의 정치와 국민의 분열은 처참한 공멸만이 기다릴 뿐이다.
우리 국민은 과연 누구를 믿고 어디에 기대어 희망을 찾아야 하는가?
좋은 文學 경북지회장 박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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