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69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의 식민통치사업 중 가장 대표적인 사업 목록에 창씨개명과 함께 창지개명이라는 것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멀쩡한 지명을 자기들 식으로 바꾸기도 하고, 지들 멋대로 붙이기도 했다. 기존 이름을 합성하기도 하고, 의미 없이 아무렇게나 붙이는가 하면, 때로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이름을 갖다 붙이기도 했다.
물론 가장 끔찍한 것은 국호를 ‘대한제국’에서 ‘조선’으로, 서울을 ‘한성’에서 ‘경성’으로, ‘순종황제’를 ‘이왕’ 격하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국토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을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으로 갈라놓았다. 크다는 뜻의 ‘대(大)’자나 ‘한(韓)’자가 들어가는 명칭은 무조건 바꾸었다.
산봉우리의 `왕(王)`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일본 천황을 뜻하는 `황(皇)`으로 바꾸거나 일(日)자를 더 보태어 `왕(旺)`으로 바꾸었다. 속리산 천황봉은 옛지도에 `천왕봉(天王峰)`으로 표기되어 있었으나,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지도에는 `천황봉(天皇峰)`으로 표기되어 있다. 문경의 왕릉리(旺陵里), 강원도 강릉시의 왕산면(旺山面)의 경우에도 본래의 글자를 왜곡시켰다 한다.
또 물이 돌아간다는 뜻의 ‘돌들이’를 ’석평(石坪)‘으로, 독 짓는 마을이란 뜻의 ’독마을‘이 ’동막(東幕)‘으로, 너른재라는 뜻의 너르재를 ’노루재‘로 발음하여 ’장항(獐項)‘으로, 산에 있는 밭이라는 뜻의 ’밭골‘을 ’달밭골‘이라 하면서 ’월전동(月田洞)‘으로 바꾸었다. 가까운 마을이라는 뜻으로 ’솔안‘이라 부르던 것을 ’송내(松內)‘라고 쓰고, 낮은 고개라는 뜻의 ’솔고개‘도 ’송현(松峴)‘으로 쓰고 말았다.
기암절벽으로 경치가 빼어난 청송 주왕산 제1폭포, 선녀탕, 제3폭포의 원래 이름은 용추폭포, 중용추, 용연폭포(혹은 상용추)이다. 지명에 용(龍)이 들어가면 식민지 백성의 기(氣)가 세질 우려가 있다하여 아무렇게나 바꾼 것이다.
경산시 용성면에 있는 일광리(日光里)는 일본에 `일광`이라는 지명이 있다는 이유로 쟁광리(爭光里)로 바꿔버렸다. 대전의 계족산은 애초 봉황산이었지만 봉황을 닭으로 격하시켜 계족산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우리의 전통 지명에는 `○○골` `○○배미` `○○말`등 우리 고유의 지명이 많았다. 특히 이름만으로 그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정겨운 지명들이 많았다. 이런 이름들을 일제는 갖가지 핑계로 지명을 바꿨다. 늘목마을을 을왕리(乙旺里)로, 배나무골은 이목(梨木)동으로, 밤밭골은 율전(栗田)동으로 ….
이런 식으로 일본은 억지로 지명을 고쳐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지명을 탄생시켜 나갔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지명의 현주소인 것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무리하게 왜곡시킨 지명을 광복 후 70년이 다되도록 아무렇지 않게 당당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민족은 성씨에 대한 집착력은 강해 광복이 되자마자 창씨개명을 바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창씨된 성을 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집안 일이 아니라서 일까. 대한민국의 지명찾기 노력은 별로 열성을 보이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1914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군을 317개에서 220개로, 면은 4322개에서 2518개로 축소하는 어마어마한 행정개편을 단행하면서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을 이루던 우리의 마을 방(坊)을 폐지했다. 대신에 동(洞)-정(町) 등의 엉뚱한 이름이 붙여 놓았다. 뭣보다 1, 2, 3, 4식의 숫자 행적구역명이 가장 맘에 걸린다. 휴천1동, 휴천2동, 휴천3동 등의 지명은 1정, 2정, 3정, 4정으로 지어진 일본식 행정구역명인 것이다.
우리는 왜 이런 일제식 지명을 고치려 들지 않을까? 분명 광복을 맞았지만 지명은 아직 식민지 속에 있다. 일제의 창씨개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우리 강산을 멋대로 개명한 창지개명은 성공된 셈이 아닐까.
특히, 올해는 일제가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빌미로 처참하게 창지개명을 단행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은 영원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한다. 지금 고치지 않으면 영원히 고칠 의사가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더구나 몇몇 지자체에서는 창지개명의 배경이 되는 1914년을 기점으로 하는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자칫 창지개명 성공 잔치를 우리 손으로 마련해 바치는 꼴이 되지나 않을까 염려스럽다.
배용호 소백산자락길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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