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과 여당이 제각기 입법 ‘발의’한 ‘세월호특별법’안과 세월호 유가족이 입법 ‘청원’하는 ‘4ㆍ16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건설을 위한 특별법’(이하 ‘가족안’)이 일반인들에게 크게 혼동되고 있다. 여야가 각기 법안을 제출한 가운데 세월호 희생자 전원의 의사자 지정과 단원고 학생들의 대학특례입학 내용이 들어가 있는 건 야당이 발의한 ‘세월호특별법’안이다. 대학입학특례 내용은 여당이 낸 ‘세월호 침몰사고 피해학생의 대학입학지원 특별법’에도 담겨 있고 지난 7월 15일 여야의 합의 하에 통과된 상태다. 그러나 유가족이 원하는 가족안에는 의사자 지정, 대학특례 입학, 추모공원 건립 사항이 없다. 유가족들은 단지 참사의 정확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마련을 우선시 하고 있으며 보상이나 배상은 원론만 담거나 아예 빼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유가족 측은 설립을 요구하고 있는 국가 차원의 특별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부여돼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이번에도 예전 과거사나 서해카페리 전복, 대구지하철 참사와 같은 대형 사건들처럼 특별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흐지부지 끝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런데 여당의 일부 국회의원들과 그들에 동조하는 세력들은 의사자 지정과 대학특례입학이 마치 세월호유가족이 그렇게 요구한 것처럼 터무니없이 매도하는 마타도어를 가하고 있다. 한국의 정당은 국민을 섬기는 국가기관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당리당략이나 일부 계층 혹은 단체의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하는 이익단체로 봐도 틀리지 않는다. 두 정당이 발의한 ‘세월호 특별법안’에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보다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과 지원을 우선시 하는 것도 정략적 이익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이야 어차피 정략적 의도가 있으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실제 법안내용을 확인해보지도 않고 인터넷과 SNS상에서 이념적 색깔론을 덧씌워 유족과 그 법안에 대해 벌어지고 있는 정략적 왜곡과 비열한 마타도어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부화뇌동하는 일반인이 더 문제일 수 있다. 그 부박함이 새털보다 가벼워 개탄스러울 정도다. 이성의 집단 실종이다. 정치인과 정당의 선전에 미혹되거나 놀아나는 이런 자세와 태도는 진실과 진리에 접근하는 걸 막아 자신을 무지하게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사회까지 혼탁하게 만드는 자승자박적 행위다. 난장판이 된 우리정치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국민이 져야하는 이유다. 사회와 역사발전을 막는 것은 바로 몰이성, 편견, 선입견, 마녀사냥식의 광기와 비열한 마타도어들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얘기하더라도 그것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라는 공동체와 관련된 내용인 한에선 반드시 원안을 접한 후에 자신의 의사와 입장을 정해야 한다. 특히나 여든, 야든 그 발화자가 정치인이라면 그 이면에는 반드시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국회의원 같은 권력자들뿐만 아니라 검찰, 법원, 경찰, 감사원, 국정원, 금융감독원, 국세청 등 권력기관도 마찬가지로 발화의 출발선은 조직이기주의다. 국민에게서 위임받은 공무에 대해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는 이들에게 국민은 조직이익을 국민의 이익인 것처럼 분식하는, 언제 어디서든 꺼낼 수 있는 포장지일 뿐이다. 현명한 시민이 되려면 남이 전하는 “카더라”방송은 멀리 하고, 또 여야와 좌우라는 견고한 진지에서 나와 공공성과 공동선이 담보되는 진실에 가까이 가고자 스스로 노력할 필요가 있다. 진실과 진리는 의심에서 잉태되지만 우상과 선입견, 몰이성과 편견은 그것들을 질식시킨다. 인류의 4대 성인인 예수, 석가,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모두 우상을 배제할 것을 가르쳤다. 우상배제는 기존 권위와 지식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도 기존의 모든 우상을 타파할 것을 가르쳤다. 또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gogito ergo sum)라고 했지만, 현대에는 회의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상속에서 공동선을 위한 조그마한 실천도 뒤따라야 한다. 진실을 알기 전엔 일단 입장을 유보하는 진중함과 현상을 의심하는 신중함도 더해져야 한다. 요즘 같이 복잡하고 바쁜 세상에 언제 일일이 원안을 확인할 수 있느냐고? 그래서 복잡하게 살지 말고 단순하게 살자고? 당연히 이런 반발도 존중돼야 한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그럴 자유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살겠다면 그 대신 사회와 나라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은 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남들에게 “잘 살아라”, “열심히 살자”, “건강해라”는 등의 말도 하지 말라. 왜냐하면 개인의 삶과 인생이 개인사로 끝날 것이라 싶어 그렇게 말하는지는 몰라도 개인의 삶도 사회와 국가에 깊숙이 포박돼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개인의 질병까지도 사회적 산물로 인정하고 국가가 치유해주려는 게 선진 복지국가의 추세다. 마치 물고기와 물이 그렇듯이 물이 오염되면 물고기들이 제명대로 살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불교 唯識無境論의 ‘一水四見’이라는 말을 조금 변형하면 물고기에게 물은 공기이자, 집이고, 사회이자 국가다. 이처럼 물고기 같은 미물도 그러한데 사회적 존재인 인간들 가운데 사회와 국가에 깊이 연관돼 있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는가? 국가가 개인의 삶을 구속하는 국가체제가 무너지지 않고 있는 현재까지는 인도 신화 속 거대한 인드라의 그물처럼 우리는 각기 그물망(즉 네트워크)의 한 코로 연결돼 서로 얽혀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자신의 가족이나 친지들 가운데 변을 당한 사람이 없다 해서 세월호참사가 남의 일처럼 보이는가? 그중 한 사람이라도 참사를 당했다면 누구라도 지금 엄청난 비통, 고통, 분통의 3통이 혼재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거다. 의사자지정 등 국가적 보상에 눈이 멀었다는 식의 매도와 정치공세를 당하는데 억울함과 분통해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국가와 사회와 깊이 포박돼 있음을 절감하게 되겠지만, 꼭 참사를 당해야만 국가와 연관돼 있는 건 아니다. 하루빨리 집단 몰이성에서 깨어나야 한다. 여를 지지하든, 야를 지지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한 건 좌우, 진보와 보수의 승부라는 적대적 진영논리에서 벗어난 이성과 합리성의 회복이다. 이성은 국가 사회의 도덕을 떠받치는 최소한의 토대다. 이성이 사라지면 여야든 진보와 보수든 모두 공멸한다. 이성적 국민이 다수가 되는 사회는 정말 요원하단 말인가? <본지 객원논설위원> 서상문 포항 환동해미래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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