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오래된 것일수록 더 아름다운 법이다. 소나기 한줄기 내리치는 오후는 옛 추억이 더욱 간절해진다. 가난했지만 넉넉했던 그 시절의 기억. 6ㆍ25 전후 먹을 게 변변찮던 시절. 그때의 먹거리로는 감자가 대표였다. 울퉁불퉁 못 생겼지만, 잘 구슬러 쪄내면 포슬포슬 살이 찌는 감자. 영양도 웬만하여 한 끼 식사가 훌륭하던 감자. 그런 감자에 얽힌 기억은 대개 가난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민초였다. 아리랑이었다. 그래서 김동인의 「감자」는 그 시절을 대표하는 단편소설이 되었다. 가난한 사람은 주로 어른이었다. 어른들의 가난과는 별개로 아이들은 오후는 주로 간식을 찾아 집을 나섰다. 그 시절 「감자묻이」는 아이들 최고의 낭만이었고, 대표 이벤트였다. 소 먹이러 가는 길에는 으례 「감자묻이」가 있었다. 「감자묻이」 맛에 홀려 슬그머니 소타래 잡았던 기억도 난다. 아이들에게 있어서의 「감자묻이」는 방과후학교이자 나머지학습이었고, 삶의 방법을 익혀 가는 현장체험학습이었다. 보릿고개의 대처방안이었고, 가을로 가는 징검다리였다. 겨울 사랑방을 달아오르게 할 중요한 토론 소재의 비축이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행사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씨 붙일 적부터 감자밭을 눈여겨 봐 두어야 했다. 감자가 여물어가는 과정을 열심히 관찰하기도 해야 했다. 「감자묻이」이벤트에도 꾼들은 있기 마련이다. 이른바 선수들이다. 이들은 감자서리를 비롯해 돌탑 쌓기, 까치구멍 물 붓기 등 행사 주요부분을 관장하게 된다. 날쌘 몇 놈이 감자서리를 위해 자리를 뜬 사이, 남은 녀석들은 나누어 구덩이를 파고 땔나무 줍고 쓸 만한 자갈돌을 모아둔다. 대충 준비가 끝나면 솜씨 좋은 꾼들은 펀펀하게 다듬은 터에 반석돌을 깔고, 그 위에 자갈돌을 쌓은 다음 불을 지펴 돌을 달군다. 자갈돌이 하얗게 질리면, 비워둔 가운데 구멍으로 감자를 넣고 진흙으로 감싸 덮는다. 그래서 「감자묻이」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땅을 조금 파서 돌을 쌓기 쉽도록 기초를 다잡은 다음, 아랫부분에 손바닥 크기의 비교적 큰 돌을 깔고 윗부분으로 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여 무너지지 않게 첨성대 모양으로 돌을 올린다. 맨 아래에 아궁이 구멍 하나 만들고 첨성대 비슷한 모양이 갖춰지면 정수리부분은 주먹 한두 개 들어갈 크기로 구멍을 남긴 채 불을 지핀다. 구멍은 굴뚝역할과 동시에 나중에 감자를 넣을 구멍이다. 땔나무에 불을 붙이면 돌탑은 서서히 달아오르고, 돌 색깔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계속된다. 돌이 제대로 달았다고 판단되면 알불만 남기고 맨 위 돌을 몇 개 안으로 무너뜨려 알불위에 한 꺼풀 깐다. 이는 감자가 직접 불에 닿아 새카맣게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이다. 돌이 한 꺼풀 깔리면 감자를 또 한 겹 넣는다. 그 위에 다시 돌을 한 꺼풀 깔고 또 감자를 넣고, 이렇게 반복한 후 모아두었던 진흙으로 재빠르게 무지를 덮는다. 이 동작은 빠를수록 열기를 덜 뺏기기 때문에 꾼들의 주관 하에 손을 총동원하여 이 작업을 잽싸게 마무리 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봉우리에 쑥 같은 억센 풀을 하나 살짝 꽂아 놓으면 공사는 끝이다. 이 풀은 나중에 감자가 잘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를 확인하는 리트머스시험지 역할을 하게 된다. 풀이 충분히 삶기면 안에 든 감자도 잘 익었다는 뜻이 된다. 입술이 새파랄 때까지 멱을 감고 나서면 감자는 알아서 잘 익어 있다. 급한 김에 서둘다 보면 덜 익은 생퉁감자를 먹어야 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아이들의 「감자묻이」는 어른들의 「삼굿」에서 분양되었던 것 같다. 옆방 구덩이에서 돌을 달군 후 물을 부으면 뜨거운 수증기가 구멍을 통과하여 옆방 길쌈을 쪄 내는 이른바 삼구지 방식이 「감자묻이」의 교본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감자구지’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그러고 보면 「감자묻이」는 꽤나 오랜 세월동안 아이들의 속 깊은 동반자이지 않았을까? 이제 감자 쪄 먹던 어른들 세대는 잊혀만 간다. 그리고 「감자묻이」같은 아이들의 협동행사는 사라진 듯하다. 요즘은 아이들의 더불어 사는 모습은 흔치 않다. 혼자 즐기는 군것질마저도 너무 사치스러워져 있다. 스마트폰에만 너무 집착해 있다는 생각이다. 『폰으로 ‘빵셔틀’까지 모두 해결되는데, 촌스럽게「감자묻이」는 무슨……』 「감자묻이」가 아이들의 인성을 함양의 바로미터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과정 모두가 칭찬받을 일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어른들이 빙긋이 웃어주는 여유의 공간 속에 아이들의 특별한 방과후학습이 진행된다고 그렇게 너그럽게 볼 수는 없을까? 요즘 아이들은 힘들고 어설픈 과정을 감당해 보려 하지 않는다. 과정은 고사하고 쪄 놓은 감자를 먹으러들지도 않을까 두렵다. 앞으로 이 세상엔 어떤 감자가 남을까? 어떤 삶이 남을까? 배용호 소백산자락길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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