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분단은 조선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 간 적대적 관계의 산물이 바로 분단 건국이다. 그렇다면 두 나라 중 어느 쪽에 진짜 큰 책임이 있는 것일까? 해방 직전부터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역사를 일기 형식으로 되살린 `해방일기` 시리즈를 집필 중인 역사학자 김기협 전 계명대 교수가 `해방일기` 다섯 번째 책 `길 잃은 해방이 가져온 비극`을 펴냈다. 이 책은 시기상으로는 1946년 9월 2일부터 그해 12월 30일까지를 다뤘다.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1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의 3년의 대장정을 책 10권에 담아낼 계획이었던 그로서는 전반기를 완성한 셈이다. 김 전 교수는 "일본 통치로부터 해방된 지 1년이 지난 이 시점, 미국과 소련의 책임을 평면적으로 비교해 보면 미국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지적했다. 그는 "소련군은 진주하자마자 조선인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지원하며 일본인의 행정권과 경찰권을 인민위원회에 넘겨줘 조선인의 자치에 맡기고 후원자의 위치에 머물렀다. 반면 미군은 조선을 통치하던 총독부의 권력을 넘겨받아 스스로 통치자의 위치를 차지했다"고 설명했다. 대의기구 구성에서도 같은 차이가 나타난다. 이북에서는 1946년 11월 선거를 통해 최고인민회의라는 의회를 만들었지만, 이남에서는 입법의원 90명 중 절반을 주둔군 사령관이 임명했다. 이어 군정청의 조선인 간부진을 묶어 `남조선임시과도정부`란 이름을 붙여 조선인 자치의 인상을 주려 했으나 조그만 일 하나라도 최종 결정권은 `고문` 명목의 미군 군정관들이 쥐고 있었다고 김 전 교수는 지적했다. 그는 "소련이 착한 나라고 미국이 악한 나라라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면서 "소련도 같은 시기에 폴란드 등 동유럽 지역에서 한 짓을 보면 미국보다 나을 것이 없다. 조선에서 소련의 태도가 미국보다 좋았던 것은 조선 사정이 소련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조선인을 억압한 일본의 경제정책이 자본주의 정책이었던 데다 일체의 항일운동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던 조선총독부의 관행 때문에 해방 당시 조선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민중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인의 선택에 맡길 경우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가 선택받을 상황이었으므로 소련은 조선에서 강제적 수단을 쓸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김 전 교수는 6권 이후부터는 `부도덕한 지도자`였던 이승만이 김구, 김규식 등 경쟁자들을 확연히 따돌리고 득세할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었는지 추적해 나가겠다고 예고했다. 김 전 교수의 부친은 `역사 앞에서`의 저자인 역사학자 고(故) 김성칠. 모친은 이남덕 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다. 일기라는 형식을 빌려 해방정국을 되살려낸 것도 6·25전쟁을 일기 형식으로 생생하게 기록한 `역사 앞에서`의 영향이 컸다. 그는 `해방일기` 1권에서 선친을 언급했다. "아버지가 전쟁이란 상황에 맞닥뜨려서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힘껏 모색하셨듯이 저 역시 통상적인 서술방법으로는 한계를 느끼는 주제 앞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으로 `해방일기`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그는 환갑을 맞은 지난해 8월 1일부터 `해방일기`를 쓰기 시작해 60주가 넘는 동안 매주 원고지 100여 매씩 글을 쓰고 있다. 김 전 교수는 특이한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서울대 이공계 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했다가 사학과로 전과했다. 계명대 사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다 역사에세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다.너머북스. 476쪽. 2만3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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