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63)은 대뜸 전자 기타를 잡았다. 그리고는 기타 줄을 튕기며 1994년 발표한 15집 수록곡 `남겨진 자의 고독`을 맛보기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번 공연에서 이 곡의 기타 솔로를 할 겁니다. 멜로디가 안 알려진 곡인데 재작년 리퀘스트가 왔죠. 그때 못해서 이번에…." 10년 만에 발표한 19집 `헬로`(Hello)로 올봄 신드롬을 일으킨 조용필은 20일 서울 서초동 YPC프로덕션 연습실에서 전국투어 공연 연습이 한창이었다. 이곳에서 만난 그는 열풍의 기쁨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한 채 오는 31일 체조경기장에서 시작되는 전국투어를 위한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달 전에 공연 레퍼토리를 만들었는데 19집에서 8곡 정도 선보입니다. 19집 곡들의 리듬이 단단해서 기존 곡들과 어울리도록 레퍼토리를 수정하고 또 수정했죠. 살맛 나냐고요? 오히려 긴장된 삶입니다. 하하." 돌이켜보면 무대에서 45년을 산 그지만 고삐를 늦춘 적이 없다. 그는 "열심히 부딪혀야 한다. 내 머리가 깨지든 바위가 깨지든 벽이 깨지든. 지금 이 시대에 음악적으로 얼마나 똑똑한 사람, 잘 만드는 사람이 많나. 그걸 이기려면 폭탄 들고 뛰어내려야 한다"는 말로 음악을 대하는 집념을 대신 표현했다. 19집의 신드롬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혁신적인 음악으로 평가받으며 음원차트 1위, 가요 순위 프로그램 1위는 물론 판매량이 20만 장에 육박했다. 공연은 음반 발매와 함께 일찌감치 매진됐다. 20-30대가 찾는 강남의 유명 클럽에서는 `리스펙트 레전드 조용필-헬로 데이`란 타이틀로 조용필의 신곡을 리믹스해 트는 이벤트가 열렸고, 초등학생들이 바운스`(Bounce)로 UCC를 만들어 화제가 됐다. 그는 "초등학교 2학년, 4학년 애들이 만든 UCC를 보고 놀랐다. 너무 귀여웠고 잘 만들었더라"고 웃었다. 그러나 정작 조용필은 열풍의 테두리에서 한걸음 떨어져 있는 듯 보였다. "누가 물어보더군요. 뜬 상황을 아느냐고요. 그런데 제가 다니는 곳이 집, 사무실밖에 없고 밥도 주로 식당에서 시켜먹으니 바깥 사정을 몰라요. 사람들이 지하철 타거나 옷 파는 동대문에 가도 제 노래가 나온대요. 인터넷 댓글은 가끔 보는데 앨범 발표 초기 `표절`이란 악플도 있었는데 바로 사라지더군요. 표절이라고 하면 뜬 곡입니다. 하하." 이문세, 신승훈, 이승철 등 후배들이 롤 모델로 삼으며 선배의 흥행에 기뻐하고 있다는 말을 전하자 "롤 모델로 지목해주는 건 감사하고 영광"이라고 했다. "요즘 제 일에 휘둘려 후배들과 통화를 많이 못했어요. (이)문세하고는 잠깐 통화했는데 공연만 겹치지 않았다면 꼭 보러 가고 싶었죠. 제가 문세 노래를 좋아해요. 그게 좀 아쉽죠. (신)승훈이, (이)승철이도 열심히 하는 후배들이어서 좋아합니다." 이같은 반응은 운 좋게 나온 게 아니다. 그의 앨범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면 철두철미한 프로 정신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스스로도 `빡센` 작업이었다고 했다. 사실 19집은 지난 10년간 세 번이나 준비를 했다가 물러선 앨범이다. 홀로 곡을 쓰다가 막히면 잠시 접어두고 다른 곡을 잡았다가 또 막히면 포기하는 과정이 반복되자 자책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렀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지난해 처음으로 공연 일정을 모두 접고 미국, 영국, 태국 등 5개국을 돌며 작업했다. 일단 과거의 자신을 붙들고 있으면 구태(舊態)라는 생각에 자신을 버리기로 했다. 현재와 미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모든 걸 바꾸기로 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1990년대 초까지는 의무적으로 음악을 생산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10년의 공백기가 있었고 미래로 가야 하니 과거의 저를 버릴 수밖에 없었죠. 미래로 가도 될까 말까 하잖아요. 이번 공연 제목에도 45주년이란 걸 한마디도 안 붙였어요. 다 바꿔야 했거든요." 그로인해 조용필 세대인 중장년층 팬들만을 위한 음악을 만들 수 없었다. 그는 "그 세대들 때문에 한 게 절대 아니다"며 "`내가 좋아하는 음악으로 가자`는 생각 하나밖에 없었다"고 강조했다. 발맞춰 창법도 변화를 줬다. 바이브레이션의 깊이를 줄였고 음을 끄는 길이도 짧게 했다. 종이 악보에 멜로디를 기록한 뒤 연습을 하면서 `꼭 지켜야 할 것`들을 빼곡히 적어 다시 악보를 만들었다. "1980년대에는 그때의 정서가 있었어요. 그땐 한(恨), 정(情)이란 게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은 사라졌죠. 단어가 바뀌듯 문화도 바뀝니다. 미국의 스탠더드 뮤직이 1950-60년대와 1990년대, 지금 다른 것과 같은 맥락이죠. 따라서 창법도 변해야 했고 가사에 싣는 감정도 절제했어요. 단, `걷고 싶다`와 `어느 날 귀로에서`는 제가 감정을 낼 수 있는 곡이어서 계산하고 억제하며 불렀죠." 다행인 건 그가 지금 팝 시장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현재 빌보드를 장식하는 마룬파이브, 브루노 마스, 펀, 켈리 클락슨의 이름을 줄줄이 꿰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 휴대전화에서 즐겨듣는 스트리밍 곡을 보여주기도 했다. 연구 대상 음반을 발견하면 바로 구입한다고도 했다. "젊은 세대의 음악을 들으면서 놀라는 건 음악의 변화 폭"이라며 "지금은 확실히 팝 록으로 옮겨간 상태"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과거 조용필의 음악이 지닌 시적인 가사 등이 사라진 걸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스스로 놓치고 간 부분이 아니냐고 묻자 "난 그렇게 생각 안 한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사람마다 얼굴과 머리 스타일이 다르니 나비 넥타이가 어울리는 사람도, 안 어울리는 사람도 있다"며 "지금 내 음악에 시를 멋지게 부르면 어울리겠나. `헬로`에 `어느 날 귀로에서` 가사는 안 어울린다. 곡마다 7-8개 가사를 쓰고 리듬에 맞는 걸 택했다. 멋있는 말은 여러 의미가 함축된 한자에서 나오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귀로`란 단어도 모르더라. 좋은 가사가 나왔지만 곡에 안 어울리는 경우도 많았다. 사운드는 둘째 치고 정말 가사가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모든 작업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위기도 수차례였다. 물론 그의 고집때문이었다. "음원 믹싱을 끝내고 런던에서 마스터링을 했는데 마음에 안 들었어요. 비욘세의 앨범 작업을 하던 (세계적인 마스터링 전문가인) 토니 마세라티를 찾아 마스터링을 다시 요청했죠. 저와 스태프가 태국의 한 녹음실로 건너갔고 마세라티가 작업한 음원을 보내주면 전화로 의견을 나누면서 수정을 거듭했죠." 사운드에 대한 검증도 철두철미했다. 곡이 나올 때마다 소리의 강약을 조절해가며 스피커로, 헤드폰을 끼고, CD 플레이어로 듣는 다섯 단계의 체크 과정을 거쳤다. 그는 "타이틀곡 `헬로` 한 곡만 수백 번을 들었다"며 "그래도 아쉬움이 너무 많다"고 했다. 오는 28일 발매 예정인 LP 음원도 최근 독일로 다시 보내졌다. 180g 중량반으로 출시될 LP B면 곡의 사운드 밸런스가 맞지 않다는 조용필의 세심함 때문이었다. LP는 주문량이 1만장이나 들어온 상태로 보통 LP를 찍는 수량이 300-500장, 한정판의 경우 1천장인 추세를 감안하면 놀라운 수치다. 이같은 인기는 국내를 넘어 아시아권으로도 이어졌다. 조용필의 음반을 유통하는 유니버설뮤직코리아로 일본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권 국가에서 발매 요청을 해온 것. 그는 "9월 이후 19집 곡들이 일본과 아시아권에 출시될 예정"이라며 "일본에서는 `헬로`와 `충전이 필요해`를 일본어로 개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영어 버전은 아직 가능성이 많지 않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일본 진출 경험에 대해서는 "한국과 일본의 음악 시스템 차이가 컸다"며 "당시 일본 시장은 콘서트 문화가 세계적이었는데 150-200명 들어가는 라이브 공연장에서 쇼케이스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방송 출연을 하는 상황이어서 그걸 접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19집의 해외 발매를 염두에 두면서 수록곡 `바운스`와 `걷고 싶다`의 뮤직비디오도 촬영하기로 했다. 최근 충남 태안 바닷가에서 촬영한 `걷고 싶다` 뮤직비디오에서는 직접 립싱크로 출연도 했다며 멋쩍어 했다. 이처럼 음악에 함몰된 삶이 외롭지는 않을까. 그는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좋아서 하는 것"이라며 "외롭다고 생각하는 건 오히려 자신 없고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일이 많으면 외롭지도 않고 스트레스도 안 받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20집 작업에 대한 설렘을 드러냈다. "19집을 만들면서 코드 진행과 악기 쓰는 방법, 믹싱 과정 등을 더 깊이 알았어요. 이번 앨범이 너무 세서 파격적인 모양새가 될 수 있을까 부담은 되지만 분명한 건 20집은 더 강하게 갈 겁니다. 쉬우면서도 음악적이고, 간단하면서도 복잡한 멜로디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게 관건으로 해외 뮤지션들과 공동 작업을 할 겁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을 보이면서도 그는 자신이 무대에 서는 마지막에 대한 그림을 그려보는 듯했다. 그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지막 공연을 봤을 때 너무 슬펐다"며 "난 객석이 내 음악을 들을 때까지 한다는 건 솔직히 자신이 없다. 무대에서 두 시간 반 동안 공연할 수 없는 상태가 되면 스스로 물러설 것이다. 아니면 내가 너무 가슴 아플 것 같다. 그래서 운동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발버둥치겠다"고 빙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주저하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나이가 들어 꼬부라지고 걷지 못한다면 허무할 것 같아요. 건강하게 일할 수 있을 때까지가 제대로 사는 삶이라고 생각해요."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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