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그 날, 후줄근한 검은 상복을 입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엄마라고 불러 볼 기회가 없다”고….
그 한마디 말에 저의 가슴은 사무치도록 아팠습니다.
새벽 아버지 꿈에 진달래 꽃불사이로 훠어이 훠어이 손 흔들며 떠나가기에 같이 간다고 하니 "오지 마소 오지 마소” 하며 홀연히 혼자 가신지 벌써 1년이 되었네요.
그동안 계절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세월은 사람에게 아픔을 잊게 해주는 약이라고 하지만, 한평생을 희생으로 사시고 가신 어머니를 그리는 불효자식의 마음은 그때보다 더 애달프고 슬프기만 합니다.
엄마! 그동안 잘 계신가요?
막내딸 희야는 늘 바쁘게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홀로 남은 아버지 걱정 많이 되시죠?
요양병원에 계실 때도 늘 아버지 염려로 “장에 가서 고등어 사다가 구워드려야 하는데, 갈치사서 호박 넣고 찌개 해야 하는데” 앉으나 서나 아버지 생각 뿐, 당신의 건강과 안위는 안중에도 없고 평생 희생만 하고 가신 울 엄마!
간혹 두 분이 말다툼을 하셔도 결국은 아버지를 향한 극진한 사랑이었고, 자식들을 꾸중하셨던 것도 모두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깊이 깨닫습니다.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고 잘 해드리고 싶어도 이제 계시지 않으니, 너무 늦게 철든 제가 참으로 어리석고 불효한 것 같습니다 .
엄마께서 계시는 그곳에도 봄이 왔는지요? 지금 여기는 봄이 한창이랍니다.
매일 같이 다니셨던 새벽기도 가는 길의 동네 앞들에는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답니다. 곧 씨를 뿌리고 나면 새 생명이 태어나 꽃피고 열매 맺는 가을이 오겠지요.
이 대지 위의 자욱한 생명들은 결실이라는 기약이 있는데 엄마가 가신 그 길은 어찌하여 한번 가면 다시는 못 오시는 먼 길인지요?
엄마가 너무 보고 싶을 때면 꿈속에서라도 한번은 나타나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 마음이 닿지 않았는지 한 번도 제 꿈에 오시지 않으시네요.
당신의 모든 것 다 주시고 더 이상 줄 것이 없어서 다시는 나타나지 않으신가요? 막내라고 저는 항상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드리지 못한, 이 못난 딸을 가시는 날까지 염려만 안기고 보내드린 것 같아 너무 죄송하고 미안해요.
당신께서 보내신 한 많은 일평생을 제가 어찌 다 헤아릴 수 있을까요!
일제강점기 때 정신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동갑내기 종가 집 맏이한테 시집 와, 동네에서 별나기로 소문난 시어머니 밑에서, 모진 시집살이로 반평생을 보내신 엄마.
아들 셋, 딸 셋을 낳았지만, 사고와 병으로 끝내 건지지 못한 아들 셋을 가슴에 박고, 그 비통함, 원통함으로 평생을 살아온 나날들.
금쪽같은 아들 셋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오신 우리 엄마! 동네에서 아들 없는 서러움과 무시를 당해도 꿋꿋이 견디며 혼자 눈물 흘린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남편도, 남아있는 세 딸도 먼저 보낸 아들 셋을 대신할 수는 없었겠지요. 그랬기에 하염없이 걸어서 동네 교회의 십자가 밑에 엎어져 새벽녘까지 가슴 속 응어리를 풀고 또 풀곤 하셨지요.
한밤중에 꺼이꺼이 우는 엄마를 종종 보았고, 매일 호요바람 소릴 들어야 했습니다. 그 바람소리는 아무리 참으려 해도 새어 나오는, 엄마의 깊은 상처 저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한이었습니다. 가슴에 박힌 시퍼런 대못, 엄마의 가슴 속에서 그것은 영원히 아물지 않는 흉터이며 그 못은 영원히 녹슬지도 없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아픔 속에서도 또 다른 자식과 남편을 위한 해바라기가 되어 91년의 한 생을 살다 가셨습니다. 엄마의 그 고달픈 삶, 그 사무치는 마음을 제 나이 60이 된 이제야 깨달으니, 저는 참으로 무심한 딸입니다.
며칠 전에도 친정집에 갔습니다. “희야 오나”라고 하시면서 어설픈 걸음으로 반기실 것만 같았지요. 애써 엄마의 잔영을 붙잡고 싶었지만 엄마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구석구석 그 포근한 체취만 남아 있고 엄마의 빈자리는 너무도 컸습니다. 마치 세상이 다 빈 것처럼요.
엄마 기억하세요? 10년 전, 80노모가 50된 막내딸을 위해 5일장에 가셔서 사다 주신 다섯 켤레 2천원짜리 살색 스타킹!
“니는 직장 다니니 맨 날 필요하지 싶어서 사왔다” 고 하시며 비닐봉지에 꼭꼭 넣어 건네 준 스타킹, 십 년 세월에 고무 밴드가 녹아 엿가락이 되어, 우리 집 장롱 속에 눌어 붙어 있어도 차마 버릴 수가 없습니다.
육십여 년 동안 가슴을 저미듯 아프게 들렸던 엄마의 호요바람 소리.
그 소리가 오늘은 유난히 그리워집니다. 내일은 꼭 아버지를 찾아뵐게요.
엄마! 존경하고 사랑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호요바람 : ‘한숨’의 옛말
이상희(포항시 남구 대도동)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