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이 1년 남았다. 선거철이 되면 시민 단체들은 부패 정치인들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을 전개한다. 이들 중에는 환경운동단체도 있다. 총선이 국민 모두의 관심사라는 점에서 환경 단체의 행동이 이상할 것은 없지만, 환경 운동이 정치 문화에 직접적인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평가된다. 인간의 삶(행복)을 욕망과 이를 충족시켜줄 재화의 함수라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행복은 재화와 비례 관계이고 욕망과는 반비례 관계이다. 따라서 재화의 양이 일정할 때, 욕망이 커지면 행복은 작아질 것이고, 욕망이 작아지면 행복은 커질 것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에는 주로 욕망의 통제와 조절을 통해서 행복의 증대를 꾀했다. 이런 시대에는 금욕주의가 미덕이었다. 그러나 과학 기술 문명의 발달로 근대 이후에는 재화의 증대를 통해 행복의 수준을 높이려했다. 인간의 욕망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를 충족시켜줄 재화가 그 이상으로 풍족해지면 삶의 질은 높아질 것이다. 산업 사회 초기에는 그것이 가능해 보였다. 인간의 욕망은 이제 억제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욕망은 자극될 필요가 있었고, 금욕주의는 더 이상 미덕이 아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환경 위기가 대두되면서 이를 바라보는 시각이 갈렸다. 그 중 주류는 인간의 욕망은 더 이상 조절이나 통제의 대상이 아니므로 친환경적인 기술(green technology)로써 재화의 생산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기술 중심주의). 이에 대해 가장 극단적인 입장은 인간이 욕망을 줄이면 환경을 훼손하는 기술이 없어도 행복해질 수 있으므로, 욕심도 버리고 기술도 버리고 자연과 합치되는 삶을 살 것을 주장한다. 이 두 견해는 환경 파괴나 위기를 인간과 자연간의 대립 문제로 보는 공통성이 있다. 즉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모아지며, 이 점에서 양극단을 보여준다. 그런데 환경 문제는 인간과 자연간의 문제이기에 앞서 인간과 인간간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있다(사회 생태론). 이 입장에서는 환경 위기를 초래하는 근본 원인들이 모두 인간의 제도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끝없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고 또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이 이루어지는 구조 때문에 자연이 훼손되고 환경 위기가 초래된다는 것이다. 멀쩡한 가전제품이나 승용차를 새로 교체하고, 어느 곳에서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도 어떤 곳에서는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그러면서도 계속적인 개발이 남발되는 현실 앞에서는 모든 인류가 당면하고 있다는 ‘환경 위기’라는 말이 무색해지고 만다. 이런 예를 보면 환경 위기의 문제가 인간과 자연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문제임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환경 운동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다. 이제 환경 운동은 단순한 의식의 문제가 아니라, 실행의 문제요 제도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