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내수전 옛길은 세월에 지친 현대인의 어깨를 다독여 줄 힘을 주는 곳이다. 일주도로에서 유일한 흙길인 내수전∼섬목 구간(4.4Km)은 예로부터 북면 사람들이 행정중심지인 도동에 드나들던 길이다. 울릉도의 험준한 동쪽 해안을 끼고 돌며 깊은 원시림 속으로 이어진 내수전 옛길은 풍광이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이 자주 접할 수 없는 원시림을 걸으며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옛길은 황홀하다. 텅빈 산속은 한없이 자유롭고 숲의 냄새며 바람의 느낌이 다르다. 사람들은 늘 새날을 맞는다. 하지만 온전히 새로 생긴 새날은 아니다. 어제가 있어 오늘이 새로운 날이다. 어제는 없어지지만 우리곁에 켜켜이 세월로 쌓여 있다. 자연이 좋아지고 계절의 변화를 자연 때문에 느끼고, 인공보다는 자연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될 때는 이미 나이를 먹은 것이다. 오늘은 내수전∼석포 구간(3.3Km)를 걷는다. △사흗날(2023년 4월 2일)
아침에 일어나 숙소 주변에 활짝 핀 꽃들을 본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꽃들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빵과 음료로 조반을 대신하고 9시가 되자 후배의 차량에 올랐다. 울릉도에 온 지 사흗날, 울릉도 하이라이트 코스 중 하나인 내수전 옛길을 걷는 날이다. 울릉도 개척시대에 화전민 김내수(金內水)라는 사람이 곡괭이로 화전을 일구고 살았다 하여 붙여진 ‘내수전(內水田)’이다. 해맞이 명소인 내수전은 닥나무가 많다하여 저전포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내수전둘레길 입구에 도착하니 관광버스들이 여러 대 주차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울릉숲길종합안내판에는 숲길의 기원이라는 제목과 함께 천부, 죽암, 석포, 내수전전망대, 저동으로 이어지는 숲길은 폭풍우로 출항이 불가능할 때 저동으로 통하는 옛길이었으며, 정매화 계곡이 그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숲길에서 만나는 동식물로는 섬초롱꽃, 섬단풍, 섬말나리, 흑비둘기 등이 있다는 내용과 화산지형의 완만한 숲길, 해안절벽 경관, 험준한 경사도와 경작지 및 촌락 등도 소개하고 있다.
일행은 따사로운 햇살속에서 울릉의 속살을 보며 걷기로 했다. 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걸으니 흙길이 나온다. 양치식물들과 청보라빛 동해를 바라보며 걷는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한 명이 걷기에 적합한 오솔길을 천천히 가다보면 첫 번째 전망대가 나온다. 앉아서 쉴 수 있는 의자도 만들어 놓았다. 평지를 걷다가 가파른 구간에는 데크가 놓여져 안전하게 걸을 수 있다. 데크 구간이 끝나고 나면 꼬불꼬불 이어지는 길들이 정겹다.힘들면 쉴 수 있는 놓여진 의자와 길가에 만들어 놓은 안내판의 식물 소개 글. 이대, 울릉국화, 울릉미역취, 여우꼬리사초, 섬피나무, 눈개승마, 왕해국, 너도밤나무 등을 보는 것도 즐겁다. 하지만 낙석 위험 구간과 미끄럼 구간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외길이라 폭이 좁고 가파른 경사도가 있어 주위를 살피고, 나무 뿌리들이 뻗어나온 곳도 보인다. 원시림임을 느끼게 하는 고비, 일색고사리, 공작고사리 군락지는 울릉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식물들을 살피면서 부지런히 걷다보면 출렁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지나면 정매화 계곡이다. ‘정매화골 쉼터 유래’ 안내판에는 정매화라는 사람이 살던 외딴집이 있던 자리라고 ’정매화골‘이라 불린다고 적혀 있다. 걸어서 섬 일주를 왕래하던 시절, 군 소재지 마을 도동에서 북면 천부 마을로 가는 중간에 위치한 이곳은 “1962년 9월 이효양 부부가 슬하에 삼남매와 함께 정착하여 1981년 이곳을 떠나기까지 19년 동안 거주하면서 노상에 폭설 또는 폭우 속에 허기를 만나 조난을 당한 300여 명의 인명을 구조한 따뜻한 미담이 깃든 곳”이라고 쓰여 있다. 정매화골 쉼터를 지나면 이름모를 나그네들이 정성스럽게 쌓은 돌탑이 있다. 석포로 가는 길에는 깔닥 고개처럼 오르막길이 등장한다. 곧장 산길을 따라가다 보면 두 번째 전망대가 나온다. 위치가 높은 만큼 죽도가 선명하게 보인다. 바닷가 주변의 나무들은 푸릇푸릇한 싱그러움을 전해주고 명이나물과 부지갱이나물이 길가에 수두룩하다. 후배는 점심 때 삼겹살과 같이 먹자며 한 봉지 가량의 가까운 나물을 채취했다.
길은 평탄한 산비탈을 타고 도는데 중간중간 내려다보이는 죽도와 바다경치가 정말 아름답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내리막길이 나온다. 가파른 구간에는 데크 설치로 안전하지만 미끄러운 곳도 더러 있다. 죽도가 코앞에 보이는 한적하고 조용한 길 옆에 ‘석포산장’이 눈에 띈다. 독도, 죽도, 관음도가 한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북면 석포산장에는 누렁이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일행을 반긴다.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산장주인과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보니 포항에서 경찰로 근무하다가 울릉도가 좋아서 자진해서 근무를 하다가 퇴직 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잠시 쉬었다가 주인장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면서 갈 때 보지 못했던 울릉도 특산식물인 섬나무딸기, 섬벚나무, 말오줌때, 섬초롱꽃, 섬기린초, 섬단풍나무, 섬벚나무도 본다. 울릉도의 희귀식물인 섬남성, 섬말나리, 큰연영초, 천년 동안 산다는 주목의 동생 회솔나무, 천연기름인 동백나무, 굴거리나무, 섬단풍과 우산고로쇠도 보는 행운도 누린다.
내수전∼석포 구간을 왕복한 뒤 차에 올라 숙소로 가는 도중에 식육점에 들러 삼겹살을 샀다. 숙소에 도착, 가스렌지에 삼겹살을 굽고 내수전 옛길에서 뜯은 산나물로 햇반을 싸서 늦은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오후 3시 30분, 사동항에서 후포항으로 가는 출항시간을 보니 1시간여 남았다. 후배의 안내로 특산물 상점에 잠시 들러 호박엿과 젤리 몇 봉지를 기념으로 사고, 근처 레온 카페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시며 사동앞바다에 정박한 크루즈를 보며 지난 이틀을 되돌아 본다. 3일 동안 많은 도움을 주었던 후배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크루즈에 오르니 약간의 흔들림과 함께 출항을 시작한다. 큐슈남쪽 야쿠섬에 살다가 세상을 떠난 농부시인 야마오 산세이는 그의 책 <어제를 향해 걷다>에서 “사람은 누구나 목표를 자기실현이라는 한 점을 두고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자기실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되는 길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여행은 길 위의 여행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고, 거꾸로 길 위의 여행이야말로 유일한 여행”이라고 했다.
2박 3일 짧은 시간, 길 위의 여행을 마치면서 두 발로 거뜬히 걸을 수 있었음에 감사한다. 아울러 내 삶에 진정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 힘들어도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가져본다.
저녁 8시, 일행은 후포항에서 내려 주차장에 세워둔 차를 몰고 포항시내에 도착해 저녁식사를 같이하며 꿈같이 흘러간 시간에 모두 감사했다. 늦은 밤 집으로 귀가하는 길은 형형색색의 꽃들이 다투어 봄을 찬양하는 완연한 봄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