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는 내가 가보(家寶)처럼 여기는 물건 하나가 있는데 재봉틀인 "Singer 미싱"이다.외조부께서 구입한 이 "Singer 미싱"은 어머니의 어린 시절, 외할머니가 쓰시던 물건이다. 나로서는 알 수가 없으나 그 당시 황소 한마리 값을 주고 사셨다는 말만 들었다. 6·25전쟁 때는 인민군에 빼앗길까봐 비닐도 없던 시절이라 녹이 슬까 두려워 재봉틀에 시커먼 달구지 기름을 발라 가마니에 싸서 뜰앞에 묻어 두었다고 한다. 지금도 기름으로 인해 벗겨진 흔적들이 어머니의 손때와 함께 고품격(古品格)을 느끼게 한다.외할아버지는 6·25때 외가쪽으로 피난 온 우리 가족들을 위해 평소 바느질을 남달리 잘 하셨던 어머니에게 재봉틀(Singer 미싱)을 주시며 그 당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시절, 바느질을 하면서 품삯이라도 받으며 살아가라고 하셨다고 한다.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30년이 지난 지난주 재봉틀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돌려 보았으나 뻑뻑한 느낌이라 인터넷을 통해 고칠 수 있는 한 분을 찾아냈다.그분은 바로 대구 서문시장 서문교회 바로옆 "태창미싱상회" 곽병문 사장(83세)이다. 지난 60년 동안 재봉틀만 다루며 살아온 장인정신을 가진 기술자다.곽 사장님은 14세때부터 미싱(재봉틀) 한길만을 다루어온 이 시대의 마지막 장인이다.이 분은 KBS, 매일경제 등의 방송과 신문은 물론 유튜브 등에도 출연, 많은 국민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내가 가져간 "Singer 미싱"을 본 사장님은 이는 미국산과 영국산이 있는데 이 제품은 미국제품으로 180년 전 생산된 초창기 귀한 작품이며, 분해-정비하면 앞으로 100년은 더 쓸 수 있는 미싱이라고 설명했다.며칠 후 미싱을 찾아 돌려보고 실 끼우는법 등을 배우고 찾아왔다.최초의 재봉틀은 1790년 영국의 토머스 세인트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나무로 된 이 재봉틀은 한 가닥의 실고리로 한 땀 한 땀씩 가죽을 꿰매는 기계로 실용적인 재봉틀은 아니었다.본격적으로 대중화된 재봉틀을 만든 사람은 미국 보스톤 시에 이삭 메리트 싱거(Issac Merrit Singer)라는 사람이다. 도시 빈민이었던 그는 어느 날 갑작스런 병으로 인해 눕게 된다. 그 바람에 그의 아내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싱거의 아내는 낮에는 남의 집에 가서 빨래와 청소를 해주고 밤에는 삯바느질을 하며 가정을 이끌어 나갔다. 싱거는 어려움에도 불평하지 않고 가정을 위해 고생하는 착한 아내를 보면서 미싱 제작을 결심하게 된다. 1851년 뉴욕에 공장을 설립한 싱거는 ‘한 가정에 미싱 한 대’를 보급한다는 목표로 재봉틀을 생산했다. 미국에서 처음 판매된 싱거 재봉틀의 가격은 100달러였다. 이 재봉틀은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1877년, 우리나라 최초로 싱거 미싱이 도입되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일본에서 구입해 온 싱거 미싱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생전에 가장 아끼던 물건 중 하나가 바로 이 "Singer 미싱"이었다고 한다.오늘날 재봉틀은 취미용품으로 여겨지지만, 과거에는 가장 인기 있는 혼수품 중 하나였다. 기성복이 보편화하기 전까지는 집집마다 바느질로 옷을 만들어 입었기 때문이다. 이제 집사람은 옷 수선집에 가지 않아도 됐다고 좋아한다.대구를 다녀온 후 어머니의 손때묻은 "Singer 미싱"에 대한 애착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보물처럼 느껴지며 미래 100년을 향해 계속해서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다.옛것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는 시간이다.-靑松愚民 松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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