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은 레온 주의 주도(州都)답게 큰 도시다. 기원전 로마의 군사기지였던 레온은 910년에서 1301년까지 레온 왕국의 수도였다. 10세기 들어 산티아고까지 순례길이 개척되자 프랑스인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팜플로나, 부르고스를 거쳐 이곳으로 몰려와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2세기에는 레온이 순례길의 중심도시로 부상했다가 이후 레콩키스타(이슬람 세력에 빼앗긴 스페인의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점차 쇠퇴기에 접어 들었다고 한다.
레온에는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초기 건축물인 카사 보티네스, 붉은 그리스도의 궁전 레온 대성당, 21세기 현대 건축의 걸작 레온 현대미술관, 구스마네스 궁 등 빼놓지 않고 들러 봐야 할 명소가 많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안중에도 없었다. 칼사디야의 악몽이 준 여파였다. 하지만 이 또한 내 까미노의 일부였기에 후회는 없다.레온에서부터는 기차를 이용해 산티아고로 가기 위해 기차표를 예매해 두었다던 ‘58개띠’ 권 선생님은 잘 떠났을까. 약간의 ‘투덜이’ 성향 속에 지금은 박물관에나 있는 깊은 인정미가 담겨있는 분이었다. 위선과 가식으로 분칠한 ‘종교업자’보다 훨씬 신실해 보였다. 표리부동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비릿함이 그 분에게는 없었다. 오늘 산티아고에 닿을 권 선생님과 까미노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제2의 고향인 부산에서 산다고 하니 언젠가 인연이 닿으면 길에서 만날 날이 올 수도 있으리라.다음날인 16일 레온에서 산 마르틴 델 까미노로 가는 25킬로미터 구간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00킬로미터 순례길이 80년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내 생각이 이렇게 끔찍한 형태로 입증되는가.’ 라는 메모 한 줄과 예약한 알베르게 이름만 적혀 있다. 아무리 그랬어도 할 일은 해야 했다. 내가 꾸었던 꿈이라면 악몽도 내 몫인 것을. 악몽을 꾸었다고 다른 날들을 망쳐버린다면 망쳐진 날들은 무슨 죄인가. 달랑 두 문장만 적힌 텅 빈 메모장을 아쉬움이 대신 채우고 있다.출발 직후 찍은 사진을 보니 6시에 출발한 것 같다. 이날도 왼쪽 엄지발가락과 이어진 종자골을 비롯한 발이 몹시 아팠다. 11시 조금 넘은 시각, 길가 작은 수로에서 나온 물이 고인 사각의 웅덩이에 발을 담갔다. 물이 얼음처럼 차갑다. 살 것 같다. 문제는 다시 출발하면 처음보다 더 아프다는 것. 경험상 알고는 있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물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잠깐의 열락(悅樂)에도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부린 욕심이었다.어찌어찌해서 예약한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ㄱ자형태의 1층 건물이었다. 룸의 맨 안쪽 2층 침대를 배정받아 짐을 풀고 숙소 입구의 미니 레스토랑에서 다국적 투숙객들과 단체 저녁 식사를 했다. 치킨 빠에야와 샐러드, 빵으로 배불리 먹었다. 내 연배쯤으로 보이는 스페인 투숙객 중년남자가 어찌나 유쾌한지 덕분에 식사자리가 화기애애하다.다음날 새벽 5시 40분 출발 직전. 나름 아담하고 정감 있는 이 알베르게를 기억하고 싶어 사진을 찍었다. 조금씩 밝아오는 하늘을 배경으로 아직은 검은 건물이 환한 실내불빛을 내뿜는다.오늘은 산 마르틴에서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 까지 약 30킬로미터다. 출발한 지 2시간이 조금 되지 않았을 무렵 오르비고 마을에 들어섰다. 조금 더 가자 마을을 가르는 강이 나온다. 오르비고 강이다. 강 이쪽은 푸엔테 데 오르비고, 강 저쪽은 오스피탈 데 오르비고다. 길을 왼쪽으로 꺾어 다리를 건넜다. 처음엔 넓은 강이었으나 지금은 동쪽으로만 물이 흐르고 서쪽 대부분은 고수부지로 활용되고 있다.약 300미터의 이 다리는 스페인의 국민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영감을 준 중세시대의 기사(騎士) 돈 수에로 이야기로 유명한 ‘명예로운 걸음의 다리’다. 20여 개의 아치가 시선을 끄는 이 석조다리는 여러 시대에 걸쳐 완성되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 처음 축조된 이후 조금씩 변형되다 지금의 형태를 갖췄다.가장 오래된 아치는 13세기에 세워진 아치다. 스페인에서 가장 길고 오래된 중세다리로 알려진 이 다리는 돈 수에로의 사랑과 죽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슬픈 러브 스토리의 현장이다. 15세기 카스티야 연합왕국의 왕 후안2세 시절 기사 돈 수에로는 연인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 매주 하루 동안 목칼을 차고 다니기로 한다. 만약 약속을 어기면 오르비고 다리 위에서 한 달 동안 결투를 벌여 상대의 창을 부러뜨리겠다고 공언한다. 시간이 지나 돈 수에로는 매주 한 번씩 목칼을 차는 것이 힘들어지자 왕에게 다른 기사들과 결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편지를 띄워 허락받는다. 이에 그는 유럽 전역의 기사들에게도 결투참가 요청 편지를 띄운다. 수많은 기사들이 참가해 그의 편이 되거나 상대가 되어 싸웠다.1434년 7월 10일부터 8월 9일까지 성 야고보의 축일인 7월 25일을 제외하고 약속대로 한 달간에 걸친 창 대결이 이루어졌다. 다수의 부상자와 사망자를 남기고 결투가 끝났다. 돈 수에로는 목칼을 벗었다. 그 후 그는 자유의 상징인 도금된 족쇄를 성 야고보 사도에게 바치기 위해 산티아고 순례를 떠났다. 그가 바친 족쇄는 지금도 산티아고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한편 돈 수에로는 24년 뒤 이 다리에서 또 다른 결투를 하다 끝내 다른 기사에 의해 죽임 당했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돈 수에로의 연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기사도를 기리는 의미로
매년 6월 첫 번째 주말에 축제를 연다. 축제기간 내내 도시 전체를 중세 식으로 꾸며놓고 중세시장을 열고, 중세복장을 한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즐긴다고 한다. 연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돈 수에로의 기사도 정신은 이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마을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된 것이다.오르비고의 기사 돈 수에로가 한 달간의 결투약속을 지키고 연인과 해피엔딩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24년이 지나 늙어서도 또 결투를 하다 결국 이 다리에서 죽었다고 하니 설령 결혼을 했었다고 해도 해피엔딩까지는 아니겠다. 사랑은 운명보다 뜨겁고, 운명은 사랑보다 강한 것인가. 다리는 강 건너 집들 사이로 빨려들어 가듯이 뻗어 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경사지게 만든 것도 자연스럽고 이채롭다. 콘크리트 바닥에 갈색의 작은 돌을 심어 놓아 얼핏 호피무늬 같아 보이는 바닥이 마음 바쁜 순례자가 걷기에는 다소 불편했지만 높이가 낮고 일정해서 크게 나쁘지는 않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