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 보도블록 틈새로 풀들이 왁자하다 쇠비름, 질경이, 민들레, 강아지풀… 발뒤꿈치에 잔뜩 힘주고 서 있다 본래 이곳은 들판이었다풀들이 주인이었을 때는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길이 생긴다는 말에 영유권 한번 내세우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뿌리째 뽑힌 잡초들 그 자리에 각진 보도블록이 촘촘히 심어졌다풀들의 땅이 사라졌다 봄비가 스쳐가고어미가 흘린 씨앗들이 억척스레 이름을 내밀었다한 줌 틈새가 노랗게 피었다 지나는 발길에 밟혀도 자손을 퍼트리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봄볕을 이고 식구를 늘려간다<수필가가 본 시의 세상>
풀은 연약하다. 밟으면 밟히고 뽑으면 뽑힌다. 삶, 그들의 삶은 늘 그랬다. 자신들의 터를 지키지도 못하고 영유권도 주장하지 못했다. 쓸모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득만 좇아가는 이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쓸모가 없을지 모른다. 당장에 원하는 것을 주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지구상은 본래 그들의 땅이었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넓은 곳을 초원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들었다. 그들이 가진 것들을 벌 나비와 나누어 가졌다. 나누어 가진 것을 꿀이라 불렀다. 그들이 있는 곳에 나무가 자랐다. 그들이 뿜어내는 호흡을 산소라고 불렀다. 세상은 그들의 호흡을 마시며 살아남았다. 풀이 자라남으로써 눈이 선한 동물들도 와서 그들을 맛있게 먹어주었다. 영유권도 주장하지 못하는 풀들은 그 동물들의 생명 지킴이었다. 삼라만상 에게는 절대적 필요善이었다. 참으로 쓰임새가 많았다. 그들이 주인이었을 때는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평화주의자였다. 그러기에 업신 당하는 아이러니. 억울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참고 견디는 수밖에. 그들을 사람들은 ‘잡초’라고 이름 지었다. 점점 좁혀오는 자신들의 영역을 쇠비름, 질경이, 민들레, 강아지풀 등은 뒤 발꿈치에 잔뜩 힘을 주고 버티고 있다. 각진 보도블럭의 틈 사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생명을 심고 있다. 애처로워 보이는 순간, 문득 그들은 위대하다는 깨달음이 나를 전율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