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당이 까미노의 ‘프랑스 길’ 첫 마을인 론세스바예스와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사이의 정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정확한 중간지점은 성당 입구에 나란히 마주보고 서 있는 성인으로 추정 되는 두 사람의 조각상의 중간지점이다. 마을을 코앞에 두고 돌아가라고 한 것은 이곳을 거쳐 가라는 뜻인 모양이었다.사아군은 11세기말 프랑스에서 넘어온 클뤼니 수도사들이 이 황량한 메세타 지역에 수도원을 세운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14세기에는 대학이 있을 정도로 번성했으나 19세기 수도원이 해체된 이후 수도원 건물은 퇴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마을 가운데 있는 산 베니토 아치는 이곳에 중세 산 베니토 왕립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수도원 건물은 퇴락하여 흔적을 찾을 수도 없지만 화려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아름다움을 지닌 산 베니토 아치는 당시 수도원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수녀원을 개조한 데 라 산타 쿠르즈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고작 22킬로미터 남짓 걸었을 뿐인데도 40킬로미터 이상 걸어 온 듯 몸이 천근만근이다.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아가씨가 친절하게 물을 한 잔 건넨다. 사탕까지 쥐어준다. 시원한 물을 마시자 정신이 좀 돌아오는 기분이다. 자원봉사자가 체크인을 도와준다. 여권을 보고는 ‘꼬레아노’라면서 ‘꼬레아노 남자 둘‘이 있다는 14호 방으로 나를 안내한다. 도미토리 4인실이다. 간만에 안온한 분위기에서 하룻밤 묵을 수 있겠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게
누군가. 어제 까리온에서 칼사디야로 떠날 때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던 ’58개띠‘ 권 선생님이다. 까리온에서 택시를 이용해 점프를 한 듯 했다. 권 선생님은 70대의 김 선생님과 함께 있었다.김 선생님은 건장한 체구였으나 ‘풍을 맞’아 한 쪽 다리가 많이 불편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혼자 순례에 나섰단다. 더욱 놀라운 건 이번이 두 번째란다. 스페인어도, 영어도 젬병인 나와 어금버금인 김 선생님은 내가 까미노에서 만난 가장 놀라운 순례자 중 한 분이었다. 김 선생님은 단지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고 했다.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순례자인 셈이다. 김 선생님은 까미노를 걸으면서 몸이 좋아지고 있는 것을 확연히 느낀다고 했다. 불편한 몸을 이끌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곳을 홀로 걷고 있는 70대의 김 선생님은 상대적으로 젊은 나를 부끄럽게 했다.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이집 저집 들어가서 메뉴를 확인해 봐도 영 신통찮다. 나도 나지만 두 분의 입맛에 맞을만한 게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식당마다 맘에 드는 메뉴가 없다. 식사용 음식이라기보다는 간식거리에 가까운 것들 일색이다. 결국 포기하고 신통찮은 간식 같은 걸 주문해서 먹는 시늉만 한다. 그래도 김 선생님은 ‘어차피 죽지 않으려고 먹는 거니까 뭐.’라며 해탈한 표정으로 제일 먼저 접시를 비운다.마을에 축제라도 있는지 붉은 옷을 입은 악대행렬이 성인으로 추정되는 동상이 서 있는 작은 광장을 통과한다. 트럼펫, 트럼본, 튜바, 색소폰, 드럼을 연주하며 광장을 지나 골목으로 사라진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우리는 제대로 된 식사도 못하고 식당 야외 테이블에 앉아 멀거니 쳐다만 보고 있다가 알베르게로 돌아갔다.다음날 아침 권 선생님과 함께 도네이션(기부제)으로 운영하는 알베르게의 부속 식당으로 가 빵 몇 조각과 치즈, 주스로 요기를 했다. 모처럼 먹어보는 아침식사다. 70대의 김 선생님은 먼저 출발한 듯 보이지 않는다. 7시쯤 알베르게를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렐리에고스까지 31킬로미터. 중간에 두 개의 마을 밖에 없다. 단 하나의 마을도 없었던 어제 까리온에서 칼사디야까지 가는 길에 비하면 낫지만 삭막함을 각오해야 할듯하다.다행히 중간 중간 길가에 나무가 줄지어 서서 그늘을 내어 주기도 하고,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데 산인 듯 산 아닌, 산 같지 않은 산이 있었던 것도 한결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었다. 산 같지 않은 이 산은 평지에 흙을 몇 트럭 갖다 부어놓고 나무를 심어 놓은 듯 했지만 분위기는 영락없는 산이었다. 높이만 더 높았더라면 여기가 내가 어렸을 때 뛰어 놀았던 외갓집 뒷동산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국 분위기가 물씬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까미노 초반 지흔 씨가 그러더니 중간에 쉴 때 마다 양말을 벗어 발을 주물러 준 게 오히려 독이 된 걸까. 발바닥 종자골이 점점 더 아프고 물집도 쓰라리다.3시 15분 예약한 렐리에고스의 무니시팔 알베르게(공립 순례자 숙소)인 레리에고스 돈 가이페로스에 도착했다. 리셉션이 비어 있다. 기다린다. 30분이 지나서야 승용차를 타고 나타난 직원이 체크인을 받았다. 1층 샤워부스에 들어가 샤워를 하는데 누군가 내 앞 칸 부스에 들어오더니 잔기침을 계속한다. 어쩐지 귀에 익은 소리 같다. 빨래까지 해서 2층으로 올라가는데 2층에서 누군가가 내려온다. 생장에서부터 함께 걸어온 두 친구 팀의 길벗 지흔 씨다. 나보다 조금 뒤에 투숙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샤워부스에서 들은 잔기침 소리가 귀에 익다 싶었다. 지흔 씨가 내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웬만한 부탁은 거절하지 못하는 나는 그러마고 했다.세탁물을 널고 다시 1층으로 와 계단 아래 빈 공간 바닥에 앉아 알베르게에 비치된 구급함에서 바늘과 실을 꺼내 물집을 제거했다. 내 발에 물집이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건만 순례길 내내 물집 때문에 이 고생이다. 인생에서 장담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조금만 겸손했더라면 바늘과 실을 챙겨 왔을테고, 그랬더라면 이 고생은 면할 수 있었으련만. 물집 때문에 종자골까지 탈이 났고, 물집 때문에 발목에 멍까지 들었고, 그로인해 사랑과 평화의 상징인 이 순례길을 전투적으로 걷고 있으니 자만이여, 교만이여, 인생의 독버섯이여.저녁을 먹으러 주위를 배회하다 보니 파스텔 톤의 파란 페인트 색이 눈에 띄는 바가 보인다. 살짝 인도, 네팔 분위기를 띄는 건물 외벽에 페인트로 크게 ‘NO PAIN NO GRORY’라 쓰여 있다. 가까이서 본 벽면은 온통 깨알 같은 낙서들로 채워져 있다. 모르긴 해도 얼추 사랑고백인 듯 가장 많은 게 하트 그림이다.홀에 들어간다. 두 친구 팀이 바 주인과 왁자지껄 어우러져 있다. 식사분위기는 아니다. 한참 마을을 돌다가 가게 밖 입간판에 음식 사진을 붙여 놓은 곳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대로 괜찮아 보이는 식당이다. 내어주는 음식도 그럭저럭 괜찮다. 잘 먹고 나왔는데도 왠지 2프로 부족한 느낌이다. 알베르게로 복귀하는 길에 다시 아까 들렀던 파스텔톤의 파란 페인트가 눈에 띄던 바로 간다. 두 친구 팀은 없다. 유쾌한 주인 아저씨가 ‘오, 아미고! 꼬레아노 친구들 조금 전에 갔어.’ 하며 연신 노래를 흥얼거린다.야외 테이블에 앉아 나의 영혼음식이 되어버린 또르띠야와 콜라를 주문했다. 또르띠야가 거의 손가락 길이만큼 두텁다. 적당히 배가 부른 상태인데도 역시 개미가 있다. 또르띠야 맛에 취해 있는 내게 와인에 취했는지, 분위기에 취했는지 와인 잔을 든 젊은 친구 하나가 내게 말을 건다. 자신을 필립이라고 소개한 그는 네덜란드 암스텔담 자신의 집에서부터 홀로 로드용 바이크를 타고 산티아고로 가고 있다고 한다. 암스텔담이면 도대체 이 친구 몇 킬로미터를 달려온 거야? 벨기에와 프랑스를 관통해 왔을테니 모르긴 해도 족히 2천 킬로미터는 되지 않을까 싶다. 만약 산티아고까지 갔다가 거기서 다시 바이크를 타고 암스텔담으로 돌아간다면 거의 5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셈이다. 사실 이런 장거리 여행이 놀라운 이유는 거리 자체보다는 그런 거리를 달릴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루 100킬로미터 씩 달린다고 해도 꼬박 50일, 하루 70킬로미터를 달리면 꼬박 70일이 걸리는 거리를 자전거로 여행할 수 있으려면 체력보다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간과 마음의 여유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