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는 윤경 시인이 12월 첫 주에 그의 두 번째 시집 <목련은 골목을 품는다>를 보내왔다. 한동안 서로 바빠서 연락을 주고받지 못했는데 일요일 저녁에 전화가 와서 안부인사 후 지난 여름에 시집을 냈는데 못 보냈다며 받을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전화를 받고 문자로 주소를 보내고 나서 김 시인을 언제부터 알고 지냈는지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35년 가까이 되었다. 80년도 중반 문학 동인을 결성해 김 시인은 ‘문창 동인’으로 필자는 ‘형용사 동인’으로 서로 바쁘게 활동할 때였다. 김 시인이 보내온 시집 속에 ‘미륵산’이라는 시 한 편이 들어있었다.
“기억의 통로를 열어/통영앞바다를 들추면/미륵산으로 가는 길이 환하다//좁은 산길로/앞서가는 사람의 발자욱을 따라 걷다보면/헐렁해진 그 사람의 생각이 보여//단풍 든 자리, 벌레 먹은 자리마저 눈부시다//정상까지 오르도록/미역냄새, 파래냄새가/온몸을 기웃거리는데/미륵산이 몸을 뒤척일 때마다/추도, 오곡도, 두미도 같은 섬들이 출렁인다//지름길을 찾아/케이블카로 오를 수도 있지만/사는 것은 어차피 오르막 내리막을/관절 꺾으며 가야하는 길//내 안의 산을 타고 넘어냐 하는 길// -「미륵산 전문」
‘미륵산’을 읽고 난 뒤 우연의 일치인지 후배가 둘째 주에 한려수도의 비경과 미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통영 미륵산(461m)을 가자고 했다. 마침 김 시인의 시를 보았던지라 흔쾌이 승락을 했다. 미륵산은 용화사가 있어 용화산이라고도 부르는데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아름다운 경관을 조망할 수 있어서 100대 명산으로 선정된 곳이다. 토요일 오전 7시 포항에서 출발한 산벗 일행은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잠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통영대교를 지나 11시경 용화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린 3명은 등산화를 고쳐 신고 배낭을 둘러메고 미륵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용화사 주차장 담을 따라 띠밭등, 샘터를 지나니 제법 숨이 찼다. 산을 오르는 내내 소나무 숲길과 울창한 편백나무 숲이 있어서 기운을 맑게 해주었다. 산길은 정상으로 갈수록 데크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걷기 쉽도록 잘 닦아놓은 산행로를 따라 천천히 걸어 전망대, 봉수대를 지나 미륵산 정상에 오르니 시간이 2시간 30분가량 소요되었다. 몸이 좀 풀리려고 하는데 벌써 정상, 사방의 멋진 풍경을 보니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양털구름아래 섬 사이사이마다 융단을 깔아놓은 듯한 모습에 말문이 막혔다. 미륵산에서 바라본 한려수도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눈앞에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승리로 이끈 한산도도 보였다. 정상 인증샷을 찍고 점점이 흩어진 섬들을 보니 왜 이 곳이 100대 명산으로 선정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산길, 봉수대에 앉아 물 한 잔과 과일 한 조각을 나눠먹고 오다가 거북선 모양의 돌무더기(포토존)앞에서 또 폼을 잡고 사진을 찍었다. 용화사 해월루 앞뜰에는 붉고 노란 단풍이 절정이었다. 가을 단풍으로 아름다움이 절정이던 지난 구월 설악산 월정사의 단풍과 석 달이라는 시차를 두고 이제 막 물들고 있었다. 통영은 그만큼 따뜻한 곳이었다. 용화사 뜰에는 울긋불긋한 연등이 주렁주렁 걸려있고, 일주문 앞산에 가득 핀 붉은 동백은 왜 그리 서럽게 아름다운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용화사 절 마당을 벗어나 차를 타고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동피랑 벽화마을을 지나 서호전통시장에 도착하니 오후 2시다. 통영항여객터미널에 차를 세우고 기념촬영을 하고 근처 동피랑김밥식당에 들러 충무김밥, 멍게비빔밥, 생굴을 시켜 먹으니 그 맛은 최고였다.
배가 부른데도 옆 가게에 가서 통영의 먹거리 꿀빵을 샀다. 너무 배가 불러 빵은 먹지도 못했다. 일행은 소화도 시킬 겸 통영과 붙어있는 고성군 연화산을 오르기로 했다.
1일 2산이다. 산의 형상이 연꽃을 닮았다는 유래와 공룡발자국 화석지로도 알려진 연화산(蓮花山)의 높이는 528m이다. 산이 높지 않고 특징이 없는 흙산으로 주요 관광지나 국도에서 벗어나 있어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울창한 송림과 대밭에 계곡이 깊고 아름다우며 주변에 고찰과 문화재가 산재하여 1983년 9월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고성은 우리나라 최초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곳으로 고을 전역에서 발견된 것만 5,000여 개에 달해 미국 콜로라도, 아르헨티나 서부 해안과 더불어 세계 3대 공룡발자국 화석산지로 알려져 있다.연화산 느재고개에 도착해 차를 세워보니 주차장 고도가 138m이다. 느재고개에서 직진방향으로 포장길을 따라 100미터 쯤 가다보면 좌측에 등산로가 나온다. 완만한 길을 따라가니 연화1봉 오르막이 시작된다. 솔숲 사이로 걷다보니 순식간에 정상에 다다랐다. 연화1봉 정상 표석과 고성 로터리클럽에서 세운 표지석이 서 있다.인증샷을 남기고 쉼터 의자에 앉아 바라본 산아래 조망은 나뭇가지에 에워싸여 볼만한 그림이 없었다.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걸어서 천천히 원점회귀를 했다. 왕복 1시간 30분정도 시간이 지나 해가 질 무렵에 주차장에 도착했다.
옷을 털고 차에 올라 연화산을 출발, 언양에 도착해서 커피 한 잔을 나누고 출발지에 도착해 일행들과 늦은 밤에 헤어졌다. 귀가해서 씻고나서 책상에 앉아 지난 한해를 돌아보니 참 분주하게 보낸 것 같았다. 무엇을 했는지 잠시 생각을 되짚어보니 출근해서는 시간에 쫓기며 일만했고, 주말이면 산벗들과 산행을 빠지지 않고 다녔으며, 인생 3모작 준비를 위해 틈틈이 자기계발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문득 지난 일을 떠올리고 있자니 과연 나 자신을 위한 시간에는 얼마나 투자했는지를 묻게 된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지만 뭔가 허전함이 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생업에 매달려 허둥대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런저런 시간을 흘러 보낸 때문은 아니었을까. 연초에 목표했던 일들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기에 지난 시간들을 붙들고 아쉬워하고 있다는 생각이 듦은 왜일까.이제는 지난 시간들을 붙들고 있기보다는 훌훌 털고 보내야 할 때인 것 같다. 붙잡는다고 곁에 머물러줄 시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의 목표는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다’ 라는 말이 있다. 과거 때문에 현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일 것이다. 독일의 신비학자 토마스 아 켐피스는 “지금이야말로 일할 때다. 지금이야말로 싸울 때다. 지금이야말로 나를 더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 때다. 오늘 그것을 못 하면 내일 그것을 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모두는 누군가의 희생과 도움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다. 나를 위해 도움을 주고 나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흔히 등산하러 다니는 사람에게 “어차피 내려올 산 뭐 하러 올라가느냐”라고 묻는 이들이 있다.하지만 다시 배고플 것이지만 식사를 맛있게 하고, 더러워질 옷이지만 깨끗하게 세탁하며, 죽을 걸 알지만 죽지 않을 것처럼 열심히 사는 것이 인생이다.한 해를 마무리할 때면 사람들은 무엇을 이뤘고, 이루지 못했는가를 돌아본다. 지난 일을 평가하는 것이 부질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성실함의 잣대로 자신을 평가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미륵산과 연화산 1일 2산의 소회를 정리하며, 계묘년에는 좀 더 성실한 시간으로 마무리 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