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심보감(明心寶鑑) 계성편 경행록에 이르기를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아서 물이 한번 기울면 돌이킬 수 없듯이 성품이 한번 높아지면 돌아오지 않나니 물을 사람이 제방(堤防)으로써 제어 하듯이 성품을 제어 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예법(禮法)으로 제어해야 한다” 했다.중국의 대문호요 정치가인 백낙천은 새처럼 노송(老松)에 둥지를 틀고 앉아있는 조과선사를 찾아간다. 불법(佛法)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중생의 선을 봉행하고 모든 악을 짓지 말라(衆善奉行 諸惡莫作)는 뜻이다. 백낙천은 “별거 없네! 그런 소린 세 살 먹은 어린애도 한답니다” 라며 실망하고 돌아서는 뒤통수에 대고 ”이놈아~세 살배기도 알지만 백살 늙은이도 행(行) 하긴 어려운 일이다” 백낙천은 결국 돌아서서 무릎을 끓고 만다.불법(佛法)이란 글 장난 말 장난이 아니고 깨우침이며 해탈이고, 계합(契合)이며 생활이니 바로 행함에 있다는 선사의 고함소리에 정신이 번뜩 난다. 천신을 믿는 신앙의 3요소가 지(知)신(信)행(行)이다.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극락정토(極樂淨土)로 바꾸고자 함이 석가세존의 업(業)이었다면, 생명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지 못한 죄지은 노병사(老病死)의 지옥 인생을 천국인생으로 바꾸고자 천명(天命)을 수행한 예수님의 도(道)! 두 길은 차이는 있으나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높아지는 성품을 갖지 말라는 말이야 누구든지 할 수 있지만 행하기에는 난공불락처럼 쉽지가 않다. 알지 못하고 어찌 믿을 수 있으며 믿음을 뒤로한 채 무엇을 행할 수 있겠는가? 오직 자신의 성품만 높이는 욕(慾)의 결과로 인간은 천수(天壽)를 넘지 못하며 종교도 정치도 사회도 그리고 도덕과 윤리도 무지(無知) 속에서 자신의 바벨탑만을 쌓아 가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마음에 짐을 덜어내는 일에 정진하는 사람들. 그들의 무거운 짐은 때로는 족쇄가 되고 노병사의 원인이 되지만 이러한 짐을 덜어내는 종교는 인간에게 주어진 아주 무거운 업보가 되었다. 무거운 세상 짐을 가장 가볍게 메는 방법은 석가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익히 배운 바이다. 힘든 인생을 이겨낸 석가의 피골상접의 수행도, 예수님의 살신(殺身)의 십자가 고행도 자신을 위함이 아닌 신천지(新天地)를 마음에 담은 삶과 충직한 믿음과 순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불법(佛法)에도 세 다리가 삼각형으로 구족 되어야 한다. 즉 신(信)혜(慧)행(行)이라 했다. 믿음 없이 아는 것은 그 앎이 번뇌스럽고, 알지 못하고 믿기만 하면 그 믿음은 업이 되고 앙금이 되며, 믿고 알지라도 그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어 중생구제의 길이 있겠는가. 반드시 신혜행(信慧行)) 의 세 다리가 구족할 때 깨달음의 열매가 열리고 익으니 기본의 실천은 매우 중요함이다.성경에 보면 사람은 모두 죄인(罪人)이라 했고, 세상에 의인(義人)은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오직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다. 오늘날도 2천년 전의 그 때와 무엇이 다른가? 시대만 바뀌었을 뿐 이 세 가지 알고 믿고 행함이 부족함만을 탓할 뿐이었다. 스스로 죽은 무덤이 되어 알지 못해 믿을 수 없으니 이단이라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비운의 유대인들을 말함이지만, 우리 또한 그렇지 아니한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신앙은 한다고 하지만 마지막 때 없어져야 할 욕심과 교만함과 나태함 그리고 가식적이며 아부적 믿음 속에 나의 업(業)을 세우고 있는 그런 나를 발견하게 된다. 마지막 때는 노아와 롯 때 같다는 그 말씀 속에 우리의 혼미한 정신(正身)을 돌아볼 절대적 시간이 필요하다. 오늘날은 결론을 말하는 시점이라 하셨다. 하나님은 오늘날을 위해 6천년간 일해 오셨기에 내 마음속에 못된 영(惡)을 버리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늘에 영(聖靈)으로 바꾸는 일이 인생의 마지막 행(行)함이요, 또한 불경과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이기도 하다. 이제라도 내 안의 계시(啓示)말씀을 통해 “악한 욕심을 버리고 새로운 선을 담아” 미륵(彌勒)이 되고 천민(天民)이 될 수 있는 정도(正道)를 찾아 행함을 하는 지혜(智慧)를 가져야 한다. 이 길이 영과 육이 사는 정신차린 자로 남는 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