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세상이 정적에 잠겨있는 가을 새벽. 4시에 눈을 떠서 살짝 일어나 서재로 발을 옮긴다. 서재 커튼을 밀치고 창밖을 내다보니 고층 빌딩에서 뿜어내는 네온이 왠지 떨어지는 낙엽처럼 쓸쓸하다는 생각이 든다. 불을 밝히고 컴퓨터를 켠 후 늘 하던 대로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문들을 보면서 1시간가량 검색한다. 이어 독서를 시작한다. 1일 두어 시간씩 깨어있는 정신으로 읽는 책은 머릿속을 정화시킨다. 눈이 침침해질 때쯤 책을 덮고 간편한 복장으로 집을 나선다. ‘걷는 만큼 살 수 있다. 걷는 것을 생활화하자’는 평소 생각대로 숲이 잘 조성된 방장산 터널에서 출발해 성모병원 입구, 효자역, 유강코아루 고층아파트를 1시간 30분정도 걷는다.보통사람의 걸음으로는 2시간이 걸리는 구간이지만 내 걸음은 조금 빠른 편이다. 7년 동안 주말이면 전국의 명산을 오르내리는 등산의 내공이 있기 때문이다. 포항의 철길숲은 과거, 열차가 다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트레킹하기 좋은 산책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건강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트레킹을 끝내고 세면과 샤워를 하고 간단한 조식을 마치면 본격적인 하루 일상이 시작된다. 차를 몰아 회사에 도착해 기자수첩을 펼쳐 하루를 활기차게 보낼 수 있는 글귀나 명언을 상단에 적어놓고 할 일을 떠올리면서 시간대별로 메모를 한다. 오전 8시 30분, 매주 월요일마다 반복되는 주간편집회의와 10시 30분 주간취재보고가 끝나면 다양한 종류의 신문 등을 훑어보고 당일 기사에서 착상한 주제로 A4용지 2장 분량의 사설을 쓴다. 남는 시간 동안에는 오피니언 원고를 읽고 고친다. 그러다보면 어느덧 12시, 점심시간이 되면 회사 동료들과 회사 근처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러 커피타임을 갖는다. 편집국장으로 일한 지 햇수로 10년째,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울 때도 됐지만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는 말을 음미하며 하루를 즐겁게 보낸다. 나는 이순의 나이가 될 때까지 직업을 세 번 바꿨다. 20대에는 공무원과 시인, 40대에는 논술강사와 프리랜서, 50대 중반부터는 신문기자와 작가의 삶을 살고 있다. 돌아보면 끝없는 자기성장의 연속이었다. 동료 공무원의 만류에도 40에 과감하게 공직을 떠난 것도, 논술강사로서 유명세도 내려놓고 신문기자가 된 것도 편안함과 익숙함보다는 새로운 도전을 통해 성장을 지속하는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인생의 이모작’이라는 말은 생각도 못했지만, 최소한 내가 바라는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는 인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공무원이 되어 20여 년의 공직생활을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논술 강사를 그만두고 기자라는 직업을 택한 것 역시 후회는 없다. 농업에서는 같은 경작지에서 1년에 종류가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것을 이모작이라 한다. 봄에 벼를 심고 수확한 뒤 가을에 보리를 심는 것처럼 말이다. 이모작의 첫 번째 재배를 앞갈이, 두 번째 재배를 뒷갈이라고 하지만, 인생에서의 두 번째 재배는 결코 뒤가 아니라고 본다. 인생 2막을 남은 인생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1막의 인생보다 더 멋있게, 폼 나게 살 수 있는 게 이모작 인생이다.점심을 먹고 난 오후 1시, 사무실에 들어와 10여 분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는다. 이른 기상으로 식곤증 졸음이 온다. 눈을 뜨면 머리가 맑다. 오수를 즐기는 기쁨은 느끼는 사람만이 안다. 오후 2시, 편집기자들이 모두 출근하면 편집회의를 거쳐 지면배정, 다음날 출고할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문화, 스포츠, 지역의 이슈 등을 정리하고 지면교정을 하다보면 어느새 오후 6시가 된다. 저녁시간, 회사근처 영일대 전통시장에 들리면 시끌벅적한 장터의 모습과 갖가지 식사메뉴가 기다린다. 늘 보는 친숙한 재래시장. 포항의 전통음식인 물회를 비롯해 곰탕, 해물탕, 꽁치추어탕, 된장, 생선찌개 등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직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 것도 저녁 일과의 일부다.저녁식사를 마치고 시장주변에 있는 카페에 들린다. 이곳에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 마시는 기쁨도 하루의 감사함이다. 손님이 많아 앉을 자리가 없으면 회사에 곧바로 들어와 믹스커피를 마시며 편집이 끝나지 않은 지면을 기다리는 것도 즐거움이다.편집이 끝나고 대충 밤 9시가 되면 퇴근을 서두른다. 귀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으니 복 받은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나이가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끔씩 한다. ‘노후’라는 말을 의식하게 되는 나이다. 하지만 노후는 생각보다 길다. 이 기나긴 노후를 알차게 보내기 위해 내 자신의 걸음으로 오랫동안 쉬지 말고 걷자는 생각을 한다. 인생 이모작, 더 나아가 삼모작은 여기서 시작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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