엷게 드리워진 산 그림자가 영일만 앞 바다에 조금씩 몸을 담그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른 가을입니다. 책을 읽다 말고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바다에 잠시 나가 봅니다. 귓속을 파고들며 사르르 사르르……, 속살대는 파도성은 일상 속에서 잠시 잊고 지내던 아린 제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해줍니다.한동안 바다에 누워 파도성을 베개 삼아 산 적이 있었습니다. 파도에 취하고 사랑에 취해서 늘 삶의 모퉁이에서 힘겹게 비틀대었던 이십대. 눈만 뜨면 영일만의 일출을 만났고 잠이 들면 밤새도록 파도성과 씨름하며 사랑의 단꿈을 꾸기 위해 청춘의 나날을 보냈던 그 시절이 오늘 다시 아련히 뱃고동의 여음에 실려 다가옵니다.가까이 있으면서도 일상에 매몰되어 수시로 잊고 살아가는 그대가 오늘은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늦여름의 시원한 해풍이 가을을 데려다 주고서 총총히 떠나가는 이 고즈넉한 저녁. 당신과 마주 앉아 한 잔의 커피만 나눌 수 있다면 내 몸은 커피를 녹이는 온수처럼 소리 없이 녹아내릴 것 같습니다.한낮 따갑던 햇살도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어둠에 밀려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고 대지는 완전한 흑색으로 물들여지고, 이따금 어두운 밤공기를 가르며 달리는 자동차의 컹컹대는 여음도 아득히 사라지고 나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생활도 어둠과 함께 잠시 동안 휴식을 취하게 됩니다.어둠이 찾아들면 휴식과 함께 혼자라는 것을 쉽게 의식하게 되고 혼자라는 것을 쉽게 의식했을 때 동요되는 고독과 쓸쓸함. 그래서 가을에는 편지를 쓰는가 봅니다.새삼스럽게 허전하다고 느껴지는 알 수 없는 마음은 계절의 변화에서 오는 초조감 때문인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지만, 억만 겁 실타래의 인간 고뇌처럼 수없이 난립하는 언어의 파편들을 주워 모아 하나의 의미 있는 글을 쓰기 위한 순간의 몸부림, 무엇인가 형태 있는 짧은 글을 나열하고 싶지만 백지만 대하면 막혀 버리는 답답한 가슴,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지도 모르고 살아온 지난 세월, 진정 목적 있는 삶을 살아온 것인지. 밤이 새도록 고민하고 생각해도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어둠이 빛살 한 줌에 소진해 버리듯 밤새 그렇게 토해낸 진실한 언어 및 몸부림의 흔적도 살아가는 변명의 글 몇 줄 조차도. 하지만, 썩어 문드러진 영혼을 대팻날로 깎아내고 다듬어 위장과 허식이 아닌 한 층 한 층 진실로 쌓아가는 삶의 글, 희생의 땀방울을 모아 쌓은 그런 참된 글을 성실히 꾸준히 써나가야 합니다.유난히도 가을만 되면 앓게 되는 고독이라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 이 가을밤에는 갓 활자된 시인의 시집 몇 권과 마음을 옮겨 담을 수 있는 작은 노트 한 권을 들고 밤기차를 타고 제법 스산한 해풍이 불어오는 남쪽 바다로 가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더불어 사는 인생과 덧없이 사는 인생의 고민에서 벗어나 소주 한 잔 으로 삶에 지친 육신을 달래며 헝클어진 과거를 훌훌 털고 일어나 허기진 삶을 새롭게 가득 채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를 찾고 싶습니다.영일만의 가을 석양을 보며 잠시 그대를 생각하는 사이에 산그늘이 동해에 온전히 몸을 담그고, 모래밭에서 뛰놀던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만이 남아 쓸쓸한 바다의 정적을 지켜줍니다. 바다 건너 공단에도 따스한 불빛들이 하나 둘 켜지고, 영일만 가운데 한 점으로 떠있던 어선들도 차례로 등불을 밝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간간이 지나가는 차량의 불빛만 먼바다를 향해 알 수 없는 그들만의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이제는 앉았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할 시간입니다. 다음 소식 전할 때까지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