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하여 원광이 신라 사람들에게 생활의 목표로 제시했던 세속5계는 특히 젊은이들에게 생활신조로 자리 잡았고 그 후 화랑들이 이 세속 5계를 그들의 신념으로 삼음으로써 젊은 피를 전쟁터에 뿌리는 화랑정신으로 승화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러한 화랑들의 투혼은 곧 신라의 삼국통일의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삼국간에 동질감이 희박하였다는 점이다. 한반도 내에 세 나라로 나뉘어 존재하고 있었던 삼국은 본래 고조선의 후예들이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 무렵에 이르러서는 각 나라들이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삼국의 백성들이 다 같은 고조선의 후예라는 민족적 동질감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는 3개의 독자적인 국가로서 서로 원수처럼 적대감을 가지고 치열하게 투쟁하는 관계였다는 점이다. 이들 삼국의 상호관계는 같은 한반도에 위치하면서도 외세인 수나라나 일본과 마찬가지로 동족관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상대국을 공격하기 위하여 외세인 중국이나 일본을 끌어들이는 것을 당연시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이질적인 삼국의 백성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동질화되는 데에는 수백 년이 걸렸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한 후에도 한참이나 지난 10세기경에 가서야 마침내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원광은 수나라 유학 시 중국 내에서도 명망이 높았고 수양제 등 수나라의 주요 인물들과도 상당한 인맥을 가지고 있었다. 진평왕은 이러한 원광의 능력이 신라의 번성에 동력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수양제에게 요청해 원광을 신라로 귀국케 하였던 것이다. 약소국이었던 신라를 강국으로 만들기 위한 진평왕과 원광의 노력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고구려의 침공에 시달리던 신라로서는 수나라의 도움을 받아 부국강병을 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611년에는 원광은 진평왕의 명에 의하여 고구려를 공격해달라는 호소문 즉 걸사표(乞師表 또는 乞兵表)를 지어 수나라 양제에게 보냈다. 이 후 수나라는 113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그러나 을지문덕의 고구려군에게 패하여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처럼 원광은 새로운 불교 학문을 신라에 전해 주었고, 또 불교를 국가발전에 기여하도록 포교해 나감으로써 이 후의 신라 불교가 호국불교로 자리 잡게 하였고, 후세대인 자장과 원효, 의상은 그 뒤를 이어 신라의 삼국통일 대업에 동참하여 마침내 호국불교를 완성하였던 것이다. 중국 유학에서 쌓은 학덕으로 신라 불교의 초석을 놓았던 원광은 황룡사에서 99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오늘의 답사를 통해 느낀 점은 원광의 높은 법력이 신라 화랑들의 생활지침으로 새겨져 청년 전사단체의 애국심으로 승화되었고 그 힘은 곧 삼국을 하나로 통합하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반도의 일부분에 그쳤다는 논평에도 불구하고 삼국통일의 의의는 흩어졌던 고조선의 유민들을 하나로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의 민족이라는 동질감을 갖게 하였다는 점이다. 오늘 원광법사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답사의 길은 쉽지가 않았으나 땀 흘린 보람도 있었다. 원광법사가 꿈꾸었던 부국강병의 소망이 1400년이 지난 이 시점에도 여전히 그 원력이 느껴져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길에 대한 지침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