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법사는 불법을 공부하기 위해 중국으로 건너가 20여 년간 유학하였고 귀국해서는 신라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를 바라던 진평왕의 발원을 받들어 불교치국정책을 실천하였다. 그는 당시 나라가 떠받드는 고승으로서 온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가 백성들에게 ‘세속5계’를 전파하자, 청소년 수련단체인 화랑들은 이를 받아들여 소위 ‘화랑5계’로 정착시켰다. 이 당시의 원광법사의 영향력은 대단하여 왕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은 그를 추앙하며 그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이를 실천하며 신라의 국운이 왕성하기를 염원하였다. 원광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법력 높은 고승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리 잡고 주석하는 절은 결코 크고 화려하지 않았다. 깊은 골짜기의 조그만 암자에 기거하며 그의 가르침을 세속에 전파하였다. 그가 화랑들을 가르친 가슬갑사가 이런 모습이었고, 중국 유학 전 한때 수도에 정진한 바 있던 경주 안강 두류리의 삼기산(三岐山) 금곡사도 첩첩산중 산중턱에 있는 작은 암자로서 입적 후 그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 모셔진 절이다. 즉 삼기산의 협소한 암자는 그가 중국 유학을 떠나기 전에 수도한 곳이었으며, 청도 운문 삼계리의 가슬갑사는 그가 수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주석했던 작은 절이다. 이 무렵 신라 불교 정착의 과정을 보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무격적 토속신앙이 오랫동안 신라사회에 정착되어 있어서 외래종교인 불교의 수용에는 조정의 권세가들의 반대가 심하였다. 그러므로 강력한 왕권이 생길 수 없었고 그만큼 중앙집권화가 늦었다. 이때 신라사회에 퍼져있던 전통 토속신앙이란 여자 사제가 주관하던 일종의 무속신앙으로서 한때는 신국(神國)의 후예로 자처하며 신라사회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 등 국가의 중대한 의사결정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기존의 토속신앙을 밀어내고 불교가 정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법흥왕, 진흥왕 대를 거치고 진평왕 대에 이르러 원광이 마침내 신라인들에게 생활의 준칙으로서 세속5계를 전파한 것이다. 고구려와 백제는 이미 4세기 후반에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하여 중앙집권화를 이루면서 강성한 국가로 발전한 데 비하여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국력의 신장이 뒤늦게 이루어졌다. 즉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고 진흥왕이 각고의 노력으로 불교를 정착시키기는 하였으나 토착신앙에 젖어 있던 구세력의 반발이 강하여 불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러한 시기에 원광은 수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서기 600년에 귀국하면서 당시로서는 최신의 불교 학문을 신라에 도입하여 신라의 민중들에게 불교를 생활의 지침으로 삼게 하고 이를 널리 대중화시켰다. 즉 그것은 신라인들에게 불교를 실생활의 윤리로 정착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당시로서는 가장 선진적이었던 수나라의 ‘열반경’ 중심의 불법을 체득하였는데 그것은 유불도(儒佛道)의 세 종교가 그 근본에 있어서는 다를 것이 없다는 관점이었다. 그것이 곧 흔히 알려진 ‘세속5계’였다. 이러한 원광의 불교사상은 곧 신라의 국가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원광이 이처럼 세속인과 화랑들에게 생활신조를 제시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중국 유학 때 배운 수나라의 고승 신행(信行)으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강력한 왕권의 통치수단으로 불교의 적극적인 면을 채택하여 부국강병을 강조할 필요성이 있었다. 따라서 불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과 활을 들고 비구를 수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광은 이러한 신행의 수행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귀국하여 이를 신라사회에 적용하고자 하였다. 신라를 떠나 23년간 중국에서 수행한 원광은 중국에서도 이미 고승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 무렵 신라 진평왕은 수나라 양제에게 원광을 신라로 보내 줄 것을 청하였고 그에 따라 원광은 신라로 돌아왔다. 국왕을 비롯한 만백성이 원광을 환영하였고 그의 높은 법력을 흠모하였다. 수나라에서 귀국한 원광이 청도의 가실사(嘉悉寺)에 주석하고 있을 때, 사량부에 사는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라는 두 청년이 찾아와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법을 배우기를 청했다. 당시 원광이 머물던 가실사는 곧 가슬갑사로서 ‘운문사 사적기’에는 대작갑사(오늘날의 운문사)에서 동쪽으로 9,000보에 위치한다고 적혀 있는데, 이에 따르면 가실사는 오늘날의 경북 청도군 운문면 삼계리의 개살피 계곡 상류에 ‘가슬갑사 유적지’로 추정되는 폐사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개살피란 가슬갑사가 있던 작산의 갑사를 낀 계곡이라는 뜻이라고 이 마을 주민들은 전한다. 살피란 땅과 땅 사이의 경계를 나타내는 표시를 말하는데, 추정컨대 오랜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가슬’은 ‘개살’로 변음되고 이에 살피와 합성되어 이후에는 ‘개살피’로 변화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는 가슬갑사와 붙어 있는 계곡이라는 뜻으로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경상북도 교육위원회,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 1984 참조) 원광에게 배움을 청하러 찾아온 화랑 귀산과 추항은 예의를 갖추어 “저희들은 어리석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한 말씀 가르쳐 주시면 평생의 교훈으로 삼겠습니다.”라며 배움을 청하자, 원광은 “불법에는 보살계라는 10가지 지켜야 할 계율이 있는데, 이것은 임금의 신하요 어버이의 아들 된 그대들로서는 감당하기가 어려울 것이네. 그래서 세속 생활을 해나가는 데 필요한 다섯 가지 계율을 알려줄테니 이를 소홀히 하지 말고 실천에 옮기도록 하기 바라네.”라고 하였다.    그래서 전해진 것이 곧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의 다섯 계율이었다. 이 같은 원광의 가르침은 세속인들에게서 현실적 실천으로 나타났다. 진평왕 24년(602)에 백제군이 쳐들어 왔을 때, 무은(武殷, 귀산의 아버지)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이를 방어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이때 함께 소감이 되어 출전하였다. 용맹 분투한 신라군에 밀린 백제군이 퇴각 하는듯했으나 사실은 후퇴하여 매복해 있었던 것이다. 후위를 맡았던 귀산의 아버지 무은이 백제군 복병의 습격을 받아 말에서 떨어졌다. 이때 귀산은 큰 소리로 외쳤다. “전에 (원광)법사로부터 ‘싸움터에서는 물러서지 말라’는 가르침을 들었거늘, 내 어찌 감히 도망하겠는가”라며 자기의 말을 아버지에게 건네준 다음 추항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적병 수십을 죽이자 사기가 오른 신라군은 마침내 적을 물리치고 승전하였다. 그러나 귀산과 추항은 이 전투에서 온 몸에 적의 창과 칼에 상처를 입고 전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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