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답사를 통해 가슬갑사 유적지의 현장을 좀 더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가슬갑사의 터가 운문사 동북쪽 5리라고 한 기록도 있는데, 이것은 운문사 본사에서 내원암 뒤의 가파른 호거산 고개를 넘는 산길을 이용해 삼계리로 갈 때의 직선거리를 말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은 거의 이 길을 이용할 수 없다. 한편 9,000보라고 한 것은 등산로가 아닌 일반도로인 운문사-신원리-통점-삼계리-개살피 계곡의 우회로를 이용할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 약 6킬로미터의 먼 거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계리 방면과 운문사 방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지점인 신원리 일대는 신라시대에 2,000명이 넘는 운문사 승려들의 부식을 조달하기 위해 운문령을 넘어 울산에서 가져온 해초와 소금을 저장하던 큰 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그 지명을 염창(鹽倉)이라 하였다. 또한 진평왕이 원광법사를 만나러 올 때 의복을 갈아입으며 머물렀다는 황정리(皇停里)도 현재 그대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까지 주민들의 입으로 이러한 사실들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경상북도교육위원회, 『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 1984 참조)
한편 삼계리(三溪里)는 배내비, 생금비리, 개살피의 3개의 계곡에서 흘러오는 물이 합쳐진다는 의미에서 그 지명이 생겼으며, 이곳 삼계리가 신라 화랑의 발상지라는 설이 오래 전부터 전해내려고 있다. 삼계리 지역은 신라시대에는 밀양-언양-경주를 잇는 국방과 교통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운문5갑이 운문사를 기점으로 반경 5㎞이내의 요충지에 세워졌던 사실에서 신라왕실이 이 지역을 수도방위를 위한 국방상의 중요한 전략지로 삼았을 가능성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신라 사찰의 사회적 기능을 연구한 학자들 중에는 고대 교통로와 관련하여 지정학적 요충지에 건립된 사찰의 대표적인 예로 영주 부석사와 청도 가슬갑사를 지목하고 있다. 부석사는 신라의 대북 진출의 중요 거점으로 죽령을 경영함으로써 토착세력의 반발을 무마하고, 청도의 가슬갑사는 대가야 정벌의 교두보이자 신라가 백제로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국방상의 주요 거점에 지어진 사찰로 보았다. (한정호, 「신라 사찰의 사회적 기능과 가슬갑사」, 『불교미술사학 제5집』, 2007 참조)
가슬갑사는 험준한 협곡과 산의 능선을 따라 형성된 점에서 군사적으로는 천연의 방어기지로, 운송로로서는 동-서와 남-북을 잇는 요충지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삼계리에서 북쪽의 경주방향으로는 삼계리재를 넘으면 경주의 심원으로 통한다. 세속5계를 전수받았던 화랑 귀산과 추항은 경주에서 이 길을 통해 문복산 자락의 가슬갑사로 원광법사를 찾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남쪽 방향으로는 배넘이재를 넘어 운문사로 통하며 운문사에서 다시 팔풍재를 넘으면 밀양으로 통하는 교통로가 확보된다. 답사의 발길은 바깥삼계리 마을에서 산길을 따라 원광법사가 주석했다는 가슬갑사 유적지를 향했다. 삼계리에서 계곡을 끼고 문복산 정상을 향해 동서로 2개의 등산로가 나 있는데 그 중 오른쪽의 너덜이 많은 동쪽 길을 택했다. 연신 땀을 쏟으며 약 1.5㎞정도 계곡을 끼고 40여 분을 올라가자 계곡을 건너 서쪽 길과 마주치는 지점이 나왔다. 계곡을 건너 서쪽으로 문복산 정상을 향해 100여 미터 가량 더 올라갔을 때 산비탈에 암괴군(巖塊群)으로 형성된 너덜 지대가 있었고, 그 옆의 큰 바위 아래에 가슬갑사의 폐사지로 보이는 계단식 평지가 나왔다. 약 200평 가량의 계단식 평지에 폐사지 주변의 작은 산돌을 주워 모아 돌탑을 쌓아두었는데 정교하지 않고 막 쌓은 것으로 보아 오래된 것이 아니고 최근에 누군가 쌓은 것으로 보였다. 돌탑 옆에는 작은 사각 돌에 ‘가슬갑사’라고 새겨 이곳이 가슬갑사가 있던 자리임을 표시해 두었다.
그 형태나 상태로 볼 때 공공기관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또 돌탑 아래쪽 등산로 옆에는 행정당국에서 세운 것으로 보이는 4각 석주의 작은 표지석이 있었는데, 석주의 한 면에는 “가슬갑사 유적지(嘉瑟岬寺遺跡地)”라 새겨져 있고 반대쪽 면에는 “성역보존지(聖域保存地)”라고 새겨져 있었다. 이 지역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은 가슬갑사가 있던 계곡이라는 의미로 ‘개살피’라는 지명이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원광이 이 절에 주석할 당시에 화랑들은 경주에서 건천-산내-심원-삼계리 고개(문복산과 옹강산 사이)를 넘어 이곳 가슬갑사로 찾아와 원광법사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운문사 사적기’에는 원광이 ‘가슬갑사에서 점찰보를 운영했으며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적고 있는데, 과연 이렇게 좁고 가파른 지역에 많은 대중이 모여 점찰법회를 열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따라서 가슬갑사의 위치에 대하여는, 가슬갑사 본 절은 개살피 계곡 입구의 삼계리에 두고 이곳 개살피 계곡 상류지점의 산비탈 폐사지는 법사가 별도의 작은 암자를 짓고 우거했던 곳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전체적으로는 가슬갑사지가 이곳 삼계리 일대인 것은 확실하나 다만 그 정확한 지점을 확인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원광법사는 온 백성이 우러러 보는 고승이었음에도 성격이 소탈하고 생활은 매우 소박한 편이었다. 고승전에 보이는 그의 성격은 “원광은 성품이 겸허하며 여유롭고, 정이 많아 모든 사람에게 두루 사랑을 베풀었으며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띠고 성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유불도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생각이 세상에서 뛰어나고 성품이 고매하여 어지럽고 시끄러운 곳에 사는 것을 싫어하였다.”라고 전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주석했던 절은 주로 협소하고 궁벽한 산비탈의 작은 암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왕명으로 신라의 왕경 황룡사에서 백좌강회를 주관하면서도 평소에는 깊은 산중의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후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것은 분주하고 번화한 것을 싫어하는 그의 천성 때문으로 여겨진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개살피골의 폐사지가 가슬갑사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이곳이 원광법사가 주석하던 가슬갑사의 유적지라면 관계 당국은 빠른 시일 내에 폐사지 주변을 정리하고 성역보존을 위한 적절한 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삼계리 일대를 확보하여 안내간판을 세우고 진입로를 좀 더 확장해 일반인들이 쉽게 찾아갈 수 있게 함으로써 신라 화랑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했던 법사의 정신을 널리 국민들에게 알려 이곳 유적지가 갖는 의미를 되새기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번의 답사를 통해서 확인한 바로는 이곳 일대에는 이미 사유지에 많은 위락시설들이 들어차 피서 인파가 북적대고 있어 성역화 조치가 더욱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