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일연은 단군을 우리 역사에 내세움으로써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중국과 같은 연대로 끌어올린 것이다. 이 같은 일연의 자주적 사관은 고려를 지배하고 있던 종주국 몽고에 대한 저항의식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것은 중국과 대등한 우리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며 적어도 우리민족이 몽고보다는 우월하며 장구한 역사를 지닌 민족이므로 스스로 국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사대주의를 지향해오던 우리 역사에 있어서 일찍이 없었던 획기적인 시도였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일연이 남긴 교훈을 되새기면서 근세 일제강점기에 벌어진 일본의 역사왜곡 양상을 돌아보게 된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어용학자들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한국의 고대사 기록을 역사가 아닌 신화로 치부하였다. 우리 역사를 믿을 수 없다고 배척하며 그들의 고대 기록인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일본의 한국지배를 정당화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한 때 그들이 기정사실화했던 소위 ‘임나일본부설’이었다. 그러나 ‘일본서기’야말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화에 뒤쳐진 우리는 일본 역사학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어려웠다. 일본은 합리적 사학이라는 미명 아래 독일 랑케의 실증사학을 도입하여 이를 그들의 제국주의적 어용사학으로 변질시켜 우리의 역사에 적용한 것이다. 조선의 역사학은 엄연히 존재하는 우리의 역사를 사실로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사관에 의존해야만 했다. 광복 이후 학문적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오늘날에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성이 점차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그 일례로, 서기 700년경에 편찬된 ‘일본서기’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왕성하게 벌였던 대외정복 활동을 마치 일본의 신공황후가 한반도를 정복한 것처럼 서술함으로써 근초고왕의 업적을 차용한 사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왜곡의 경험들을 되돌아 볼 때 지금이라도 우리는 삼국의 고대 역사를 좀 더 명확히 정립하는데 노력을 집중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야만 향후에라도 우리의 후대가 외세에 의해 우리민족의 뿌리를 부정당하는 수모를 겪지 않을 것이다.   민족의 위기 상황에서 일연이 펼친 민족 자주정신의 고취는 700년 뒤인 일제강점기에 단재 신채호에 의하여 다시 재현되었다. 신채호는 일본의 조선민족정신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에 대한 연구서인 ‘조선상고사’ 총론에서 우리 민족의 진취적 기상을 강조하면서 고려 중기 사대파와 자주파의 대결에서 김부식 등 사대파가 묘청 등 자주파를 누른 사건을 역사적으로 재평가하였다. 고려왕조가 한창 번성할 무렵인 인종 때에 김부식 등의 사대파 유학자들에게로 권력이 집중되자 승려 출신 묘청이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민족 고유의 ‘낭가사상’을 근거로 자주 독립을 외치다가 김부식 등의 반대에 부딪히자 난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묘청의 난’이다. 이에 대하여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난을 “조선민족 일천년 이래 최대의 사건”이라 평하였으며, 묘청의 난이 실패함으로 인해 우리민족의 자주성은 크게 꺾이고 말았다며 안타까이 여겼다. 역사에 있어서 가정은 무의미한 일이지만,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며 우리민족의 고유한 정신과 자주독립 의식을 강조했던 신채호의 그 정신만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이라 생각된다. 삼국유사 편찬의 문화사적 의의는 삼국의 역사와 유사 이래 형성된 고유의 문학작품들을 채집, 정리함으로써 사라질 위기에 있었던 우리의 문화유산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남겨놓았다는 데 있다 하겠다. 일연이 서둘러 이에 대한 보존대책을 강구하고 기록으로 남긴 노력의 결과물이 삼국유사에 실린 향가, 민담, 설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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