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문사는 1400여 년의 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숱한 파란을 겼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유물들이 훼손되거나 멸실되었다. 농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운문사에 세워져 있었다는 신도비, 고승행적비, 위답노비비, 중창사액비 중 노비비와 사액비는 농민항쟁의 와중에 파괴되고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명종 23년(1193) 이곳 운문사의 승려출신으로 추정되는 김사미는 운문산을 거점으로 운문산 너머의 초전(밀양부 소속의 지명인 듯하다)에서 봉기한 효심(孝心)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고려정부를 위협하는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운문사는 농민군과 토벌군의 대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부군은 번번이 농민군에게 패배하였다. 김사미가 사망한 후에도 난의 주도권을 동경야별초 출신의 패좌(孛佐)가 이어받아 농민군은 계속 저항하였고, 여기에 이 지역의 지방관인 동경도령 이비(利備)가 가세함으로써 소위 운문적(雲門賊)이라 불린 이 농민군은 오래도록 최충헌의 무신정권을 괴롭혔다.
이 시기 운문산 중심의 농민항쟁이 쉽게 진압되지 않은 이유는 농민군이 3개의 군(軍)으로 편성된 정예한 부대를 운영하였으며, 이 지역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가깝고 농민군들이 신라부흥을 표방함으로써 지방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농민군은 경주 출신의 이의민 등 당시의 개경정부 요직 관료들과 내통하여 군사정보를 수시로 교환한 데 있었다. 그 배후에는 신라부흥을 내세우며 실권을 잡으려는 이의민의 의도와 김사미-효심 등 농민군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이의민 등이 정부 토벌군의 동태와 군사기밀을 사전에 농민군에게 흘려주는 등 간접적으로 농민군을 후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약 10년간을 끌었던 김사미의 난은 고려 중기 무신집권시대에, 사찰에 예속되어 가렴주구에 시달리던 민초들의 생활상과 무신집권자들 간의 알력, 그리고 사찰을 둘러싼 지방관들의 횡포를 짐작케 하는 일대의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운문사는 우리 문화의 보고라 할 수 있는 ‘삼국유사’를 집필한 곳이라는 점에서 이 절에 주석했던 일연선사(一然先師)와 깊은 인연이 있다. 일연은 고승이자 역사가이며 동시에 문학가로 평가되고 있다. 일연은 불교 경전이외에도 유학의 사서와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한 문장가였다. 일연은 운문사 주지로 주석하면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집필을 시작하였는데, 운문사 외에도 청도의 용천사, 군위의 인각사 등의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의 집필을 계속 이어가다가 만년에는 인각사에 머물면서 집필을 마치고 책을 편찬하였다. 일연은 이곳 운문사에 주석하기 전부터 전국의 역사유적을 일일이 발로 현장을 확인하는 작업을 해나갔다.
당시는 몽고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이라 한반도의 북쪽까지 광범위하게 답사하지는 못하고 주로 그의 고향 주변인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답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현풍의 포산(비슬산), 대구의 인흥사, 포항의 오어사 등의 주지를 역임하면서 많은 답사를 다녔다. 수십 년에 걸친 답사의 결과를 모아둔 자료를 삼국사기 및 그 때까지 전해오던 삼국의 역사서를 참고로 하여 빠진 부분을 보충해 나가며 수집한 자료와 답사한 현장을 대조 · 분석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특기할 점은 그의 신분이 승려였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비해 불교에 관한 부분을 매우 자세하게 기술하였고 은유적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는 점이다. 그것이 그가 남긴 문화유산 답사기이자 삼국에 관한 편년체 역사서인 ‘삼국유사’이다. 삼국사기가 김부식을 책임자로 한 유학자 그룹이 왕명을 받들어 편찬한 기전체의 관찬 역사서인 반면에, 삼국유사는 일연이 개인적으로 쓴 편년체 야사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에서 아예 빼버린 것이나 소홀히 취급한 부분을 보충해 서술한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사서라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란 삼국에 관하여 후세에 전하는 사적(史蹟)으로서 일사(逸事)와 유문(遺文)을 의미한다. 즉 고구려, 백제, 신라에 관하여 전해 내려오는 역사와 소문 중에 기록에서 누락되거나 세상에 드러나지 아니한 사실을 모아 기록한 것을 말한다. 일연은 그가 주석하던 운문사에 관하여도 기술하였는데, ‘삼국유사’ 권4 의해(義解) 편 ‘보양 이목(寶壤梨木)’조에는 운문사 중창조인 보양국사와 운문사 절 옆의 이목소(沼)에 얽힌 설화를 기록해 놓았다. 이목소는 운문사 경내의 오백나한전 뒤로 흐르는 약야계 계곡에 있던 깊은 물웅덩이였다. 그러나 오늘날은 제방공사로 계곡이 넓어져 이목소의 모습은 변하였고 다만 계곡을 가로지르는 극락교 다리가 놓여져 있어 정진하는 수행승들이 틈틈이 계곡 건너편의 산책로를 따라 사색에 잠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