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의 역사기행은 일연선사가 주지로 있으면서 삼국유사를 집필했던 청도 운문사와 신라 화랑에게 ‘세속5계’를 전수했던 원광법사의 주석지 가슬갑사 유적지를 돌아보았다. 운문사 창건의 역사를 살펴보면,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금수동(오늘날의 북대암 옆 토굴)에서 도를 닦던 어느 신승(神僧)이 산 아래의 넓은 터를 내려다보니 까치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므로 그곳에 큰 절을 짓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도반 10명과 함께 3년간 수도 정진한 끝에 넓은 터에 ‘작갑(鵲岬)’이라는 절을 짓기 시작하여 이후 7년 만에 5개의 절로 확대되어 번창해졌다고 한다. 그것이 소위 ‘운문5갑(雲門五岬)’으로 대작갑사, 천문갑사, 가슬갑사, 소보갑사, 대비갑사라는 절이었다. 갑(岬)이란 산허리, 계곡 등을 의미하며 주로 계곡을 낀 툭 튀어나온 장소를 말한다. 최근의 발굴조사팀에 의해 밝혀지고 있는 사실들에 의하면, 운문5갑은 신라시대 당시에는 중요한 국방의 요충지와 교통로를 연결하며 10리의 반경 안에 위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확인이 되었다.    ‘운문사 사적기’에는 운문5갑이 어느 신승의 발원에 의해 지어졌다고 하나 추측컨대 진흥왕대에 신라가 국력이 강해지고 영역을 확대하며 나날이 발전해간 시점에서 국방과 안보, 군사적 차원에서 비밀리에 국가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5갑 중 중앙의 대작갑사를 제외한 나머지 4갑은 삼국통일 이후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나라는 신라의 국방에 대하여 심한 감시와 견제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운문5갑 중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절은 대작갑사인 운문사 본사와 대비갑사터 부근의 대비사만이 남아있을 뿐, 천문갑사와 소보갑사, 가슬갑사는 그 터마저 확정이 되지 않고 있다. 그동안 경북대, 동국대, 중앙승가대학 등의 학술조사팀에 의해 정밀조사가 이루어 졌는데, 대체로 천문갑사는 운문산 안쪽의 천문골로, 소보갑사는 운문면 오진리로, 가슬갑사는 개살피 계곡 아래쪽의 운문 삼계리 일대로 비정하기도 하나 아직 확정된 상태는 아니다. 먼저 운문사를 돌아보았다. 운문사는 넓고 펀펀한 평지고찰로서 200여 학인승을 가르치는 승가대학을 운영하는 대규모 비구니 사찰이다. 그런 까닭인지 도량이 매우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운문사에는 흔히 사찰들에서 볼 수 있는 일주문과 사천왕상이 없고 ‘호거산 운문사‘라는 편액이 걸린 누각을 들어서면 바로 사찰의 마당에 이른다. 넓은 마당을 관통하는 일직선의 통행로가 뻗어있고 왼쪽으로는 운문사 사적비, 원응국사비, 설송대사비가 나란히 세워진 비각들이 보존되어 있었다. 오른 쪽으로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름다운 반송(盤松)인 짙은 녹색의 처진 소나무가 한눈에 들어온다. 언제 누가 심었는지 알 수 없으나 임진왜란 때 어느 스님이 꽂아둔 지팡이가 자라서 반송이 되었다고도 전해진다. 운문사 반송은 나뭇가지가 아래로 뻗어나가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어 ‘처진소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마치 초록 우산을 땅위에 펼쳐놓은 듯하기도 하고 시집가는 새색시가 초록색 비단치마를 살포시 들었다 내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또 그 평온한 모습은 선정에 든 스님의 자태를 보는 듯하며 부채 살처럼 옆으로 퍼져나간 가지들은 천개의 손을 가진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손길처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비로움이 묻어난다. 사철 생기를 잃지 않는 이 나무는 해마다 삼월 삼짇날이면 스님들로부터 열두 말의 막걸리 공양을 받는다고 한다. 수백 년의 세월을 보내며 크고 작은 전란을 겪고서도 이처럼 꿋꿋하고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는 것은 이 절 스님들의 정성어린 공양의 덕이 아닌가 여겨진다. 운문사는 일찍이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되어 약 2,0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던 곳이었다. 고려 초에는 이 지역 호족 손긍훈, 김식희 대장군이 선종의 보양국사와 함께 후백제의 견훤 군사를 물리치고 태조 왕건의 건국을 도왔다. 그 공로를 기려 왕건은 운문사에 많은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고 보양국사로 하여금 운문사를 크게 짓게 하였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서는 원응국사 학일(1052∼1144)이 운문사를 크게 중창하여 그 사세가 고려 500여 사찰 중 제 2찰로 불릴 만큼 번성하였다. 현재 사찰 경내에는 고려 원응국사의 비가 보물 제316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원응국사 학일은 운문사 주지로 주석하면서 운문사를 크게 중흥시킨 고승이었다. 그는 승과에 급제하고경·율·론 3장에 통달하였으며 고승의 반열에 올라 인종의 왕사를 거쳐 국사가 되었다. 숙종의 왕자인 징엄이 병이 났을 때 반야경을 염송하여 그 병을 낫게 한 공로로 왕실로부터 운문사에 많은 지원을 받아 운문사의 중흥조로 불린다. 그 시대의 불교의 주류적 경향은 선종이었는데, 왕자 출신인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자 많은 승려들이 천태종으로 옮겨 갔다. 그러나 원응은 전통적인 선종을 고수함으로써 선풍 불교의 맥을 이어나갔다. 원응국사의 비는 세 조각으로 깨진 것을 철제보호구로 고정시켜 놓았는데, 비석 위쪽의 제액(題額)에는 ‘원응/ 국사/ 비명 圓應 國師 碑銘’이라 세로로 두 글자씩 크게 양각으로 새겨 놓았다. 또 제액의 위에는 보상화문을 그린 띠를 두르고 좌우에는 각각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새겼는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비의 앞면에는 행서체로 원응국사의 생애를 찬양하는 내용을 적었고, 뒷면에는 수십 명의 그의 문도들의 이름을 승계에 따라 적어놓았다. 비문은 당대 최고의 문장을 자랑한 재상 윤언이(尹彦頤)가 지었다. 그는 고려 예종 때 여진을 토벌하고 9성을 쌓은 명장 윤관의 아들이다. 비문의 글씨는 스님으로 고려시대 제1의 명필이었던 대감국사 탄연(坦然)이 썼다. 비석은 900년 동안 갖은 풍상을 겪으면서 세 조각으로 깨어지고 이수와 귀부는 없어졌다. 제액의 글씨는 누가 썼는지 나타나 있지 않으나 해서체로 반듯하고 묵직하게 쓴 운필력에서 글씨 쓴 사람의 품격이 느껴졌다. 비의 본문에 씌어 있는 탄연의 글씨는 왕희지체의 행서로 조금도 망설임 없이 써내려간 듯 유연하다. 비문의 글씨를 보고 있노라면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생기가 느껴지고 힘차고 유려한 글씨는 볼수록 신품이라는 생각에 깊은 감동이 다가왔다. 한편 고려조에 번성했던 운문사는 수난의 역사를 겪기도 했다. 고려 무신집권기에 가장 큰 규모의 농민항쟁의 하나였던 김사미(金沙彌)의 난의 근원지가 되었던 곳이 여기 운문사였던 것이다. 이 시기 무신정권하의 수탈과 횡포를 이기지 못한 농민과 노비들이 벌인 항쟁의 대상에는 많은 사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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