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헌정사를 돌이켜보면 현행 헌법이 가장 장수하고 있다. 헌법에 따른 평화적 정권 교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과 행정 수도 위헌 판결과 그 수용과 같은 것은 장수 헌법 하에서의 소중한 경험들이다. 여러 번의 헌법 개정이 있었지만 현행 헌법이 공포된 후 약 30년 가까이 계속된 헌정 질서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입헌 민주 정치를 체험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거에는 당연시되던 헌법 규정들이나 헌법적 관행들이 과연 정당한지, 우리 현실에 타당한 것인지를 따지는 논의가 활발한 것도 이런 체험에서 비롯한다. 그런 논의로는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과 불체포 특권, 대통령의 5년 단임제, 선출직 공직의 임기 불일치로 인한 선거의 빈발 등을 들 수 있다.해마다 광복절이 되면 대규모의 사면이 있었다. 대통령의 사면권 행사 역시 과거에는 그 정당성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던 것 중의 하나다. 사면권 행사가 빈발하다 보니, 명절이나 무슨 기념일이면 으레 있는 일이겠거니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아주 제한적이고 드물게 시행되고 있는 서양의 입헌 민주 선진국에 비추어볼 때 툭하면 ‘으레 있을 것’처럼 기대를 걸게 하는 우리나라의 사면권 행사 내지는 사면 관행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사면권 자체는 동서양의 고금을 막론하고 인정되어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삼권 분립을 전제로 한 민주 입헌 국가에서 국가 원수 또는 국정 최고 책임자에게 사면권이 주어진 것은 극히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로크나 몽테스키외 등에 의해서 삼권 분립의 정치 철학적 근거가 제시되었을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불완전성과 인간에 대한 불신’이었다. 죄목(罪目)을 정하는 것, 집행하는 것, 위반자를 벌하는 것을 어느 한 사람이 담당할 경우 자의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클 것이기 때문에 그 역할을 각각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이 삼권 분립의 논리다.그러나 이것 역시 완전한 것일 수는 없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법, 사법, 집행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서 그래도 생길 수 있는 불합리한 결과를 최후적으로 막아보자는 것이 사면권이라 할 수 있다. 독일 연방 헌법재판소가 사면권에 대해 “사면권의 행사는 법률의 획일성, 경직성, 또는 수사 과정에서의 오류를 시정하고 사후에 발생한 일반적·개별적인 사정 변경을 고려할 경우에만 허용된다”고 천명한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그 동안 우리나라에서 행사된 사면권의 내용을 보면 위와 같은 고민보다는 사면권 자체가 일상적 정치 행위의 하나로 인식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법이라는 것은 공동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법을 위반했다는 것은 공동체의 존립과 발전을 저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도 법 위반자에 대해 사면을 하겠다면 그에 상응한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대규모의 사면이 있을 경우 내세우는 명분은 대개 국민 화합과 통합이라거나 경제 회생을 위해서였다. 독일 헌법재판소의 사면권 행사 기준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국민 통합과 발전을 위해 사면해야 할 범법자가 우리나라처럼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지경이라면 사면을 앞세우기 전에 그런 범법자를 양산하는 법 자체와 그 집행의 공정성부터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법적 안정성을 내세우기 전에 입법부와 사법부, 행정부가 깊이 반성해야 문제다. 다행히 이번 광복절에는 대통령의 특별사면 계획이 있다고 한다. 이번 광복절을 계기로 사면권의 본질이 훼손되지 않고 헌법의 위상이 바로 세워지는 선례를 남기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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