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야기. 무슨 덕을 보려는 듯 늦게 공부를 하겠다고 진학을 해서 젊음을 불태우고 있었다. 마지막 학위가 눈앞에 떨어질 즈음, 아뿔싸, 너무 무리했는지 어깨가 굳어져 움직임이 많이 불편했다. 논문 한 편만 더 마무리하면 그 기나긴 과정이 끝나는 지라 어금니를 꽉 깨물고 주먹을 불끈 쥔 다음 공부를 지속했다. 힘겨울 당시 희망 사항이 하나 있었는데, 답답한 사무실과 방 책상을 벗어나서 훨훨 전국일주나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다행히 우수 논문으로 학회지에 실리고 졸업논문으로 마무리, 최종 학위를 받게 되었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외로울 수 있으므로 딴에는 좋은 생각이라며 취업준비 중인 아들에게 함께 전국일주 여행을 떠날 것을 제의했다.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시도였는지 그 때는 몰랐다.선친께는 죄송하지만 가끔 씩은 부모님 말씀을 안 듣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나 같은 아들이 오히려 다행스러울 때가 있다. 퉁명스럽지만 겉과 속이 다 보이는 자식, 반면 우리 아이는 아무런 저항 없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주어 아무 의심도 없이 이것저것 챙기며 운전대에 앉혔다. 그리고는 본인은 조수석에 앉아 말벗이라도 되어 달라며 길을 나섰다. 원래의 전국여행 코스는 포항을 출발하여 이웃 마을인 이명박 대통령 생가를 찾고, 강원도 강릉에서 숙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성군 통일 전망대에 갔다가 다시 경인선을 따라 서해안 파주까지 운행, 그 이후 서해안 코스를 따라 땅 끝 마을을 갔다가 다시 남해안 해안선을 따라 통영과 거제 그리고 부산을 거쳐 포항으로 돌아오는 국토의 외곽 부를 도는 장대한 계획의 여행이었다.이것이 아주 위험한 여행이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집을 나서서 만나는 첫 사거리 신호등에서 첫 번 째 갈등이 발생했다. 신호가 바뀌자 반대 차선에서 미처 좌회전을 받지 못한 차량이 급하게 속도를 올려서 무리하게 우리 앞으로 지나쳤다. 직진을 하고 있는 우리 차와 거의 몇 센티미터 정도의 공간만 두고 사고 일보직전으로 가슴을 쓸어 내렸다. 화가 많이 난 아들과 여행 출발이라 좌회전 차량 운전자를 두둔하며 달래는 아빠와 그만 잔잔한 갈등이 발생했다. 그냥 아들의 놀람을 감싸줄 것을 이것도 교훈으로 간직하면 좋았을 아버지의 가르침과 정면충돌한 느낌이었다. 강원도 강릉에 도착해서 숙소도 뜻밖에 누추했다. 바캉스 시즌이라 워낙 숙박비가 비싸서 펜션을 빌렸는데, 바닥은 모래 투성이었다.무엇이든지 교훈을 주고 싶었던 아버지는 고성 통일 전망대에서 우리가 안고 있는 숭고한 역사적 사실과 교훈을 끊임없이 말했다. 그것부터 서로 맞지 않았나보다. 그 때부터 아이의 얼굴에서 즐거움이라는 느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이가 힘이 드니 여행 첫 날부터 서로 삐끗대었고 신체적인 차이에서 오는 인내심의 차이, 식사를 선택하는 것에 대한 차이, 집과는 또 다른 잠자리에서의 차이 등 숱한 차이에서 오는 힘겨움을 겪게 되었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를 늘 가고 싶었기에 아들과 나란히 걸으며 정겨운 대화도 나누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도서관 구석에서 만난 강원도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고, 운동 삼아 좀 걷고도 싶었다. 아이는 더위에 힘겨운 얼굴로 온통 찌푸린 상으로 한참 뒤에서 따라오는 것이었다.강원도 고성에서 휴전선을 바라보다 살짝 눈치가 보여 더 이상 근엄한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전달을 멈추었다. 대신 아이와 함께 공감을 할 무엇을 찾았지만 느낌상 늦었다는 강한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차를 돌려 강원도를 빠져나와 그 복잡하고 혼잡한 경기도 파주에서 결국 사단이 났다. 오랜 운전에 지쳤는지 조용하고 쾌적한 방을 원했고, 아깝지만 멀쩡히 예약한 방을 두고 비즈니스호텔에 숙박했다. 그제야 조금씩 얼굴이 풀어지는 아들을 보고 저녁을 먹으러 가자했다. 식사를 하면서도 뭐라도 하나 더 가르치려는 아버지의 본능이 다시 스멀스멀 나옴을 스스로 느끼면서 자제를 했다. 이 위험한 여행은 젊은 아들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라도 가르치고 교훈을 줘야 한다는 아버지의 문제임이 분명했다.그러면서도 내심 고연놈. 지 아버지하고 좀 오순도순 정겹게 여행하는 것이 뭣이 불만인지 모르겠다며 계속된 여행을 강요했다. 할아버지의 고향인 전라도 임실과 전주도 가보며 예향의 도시에 왔다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참전 용사이시면서 국가를 위해 희생을 감수했던 할아버지의 인생과 그 뜻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또 다시 주었다. 그리고 목포에 도착해서는 아들이 친구 만나러 간다며 결국은 도망쳐 버렸다. 홀로 유달산에 가보고 일본인 거리를 돌며 외로움을 느꼈다. 그래도 경기도 파주에서 아이와의 갈등으로 서로 외면하고 그 먼 거리를 한 마디 말도 없이 온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다시 목포에서 땅 끝마을 그리고 통영, 거제를 거쳐 부산을 지나왔다. 물론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누군가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의 오순 도순한 여행은 죽기 전에 한 번 씩 해야 되는 버킷리스트라고... 그러나 그 버켓리스트를 체험한 입장에서 남기고 싶은 말은 아버지는 ‘꼰대정신’을 버리고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귀 울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입 대신 아버지의 귀가 필요했고, 다 자라도 아직 아이여서 칭찬과 격려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중요했다. 처음 교통사고가 날 뻔했을 때, 아이의 입장이 되었으면 여행이 즐거웠을 텐데, 그 위험했던 순간으로부터 무엇 하나라도 교훈을 주고 싶었던 위험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위험한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해외로의 도전을 하게 된다. 그 이야기는 아주 위험한 여행 (인도이야기) 그리고 (일본이야기)를 통해 계속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