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곳은 뭣 하러 갔나? 이 예민한 시기에..” 나이는 비슷하지만 집 안의 어른 격인 친척 한 분이 호되게 나무랐다. “홋카이도 대학에 업무 차 학교 교수님 몇 분 만나야 해서..” 잘못도 없는데 조심스레 답변했다. 그러자 “아무리 그렇지만 출장을 꼭 지금 가야되나? 애가 왜 이 모양이야.” 영문도 모른 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노기에 찬 목소리에 당황했다. 지금처럼 노 재팬, 물결이 이는 가운데 일본을 방문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리 집안에 6.25 참전 국가 유공자는 있어도 독립 애국지사는 없었던 것 같은데, 환갑이 넘은 조카에게 듣기 불편한 강한 표현을 사용하며 나무랐다. 오늘 자 칼럼은 차라리 안 쓰는 것이 독자 분들에게 욕을 먹지 않는 호불호가 너무 명백하게 나누어지는 내용임이 틀림없으리라.
얼마 전,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선거 유세 중 괴한의 총을 맞아 갑작스레 유명을 달리했다. 문제는 박진 신임 외교부장관이 아베 전 총리의 빈소 조문에 비난을 퍼붓는 댓글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부터 3년 전, 그러니까 2019년 7월의 여름이 시작되는 첫 날, 대한민국 국민은 뜨거운 한 여름의 더위보다 더 짜증나는 뉴스를 접한다.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수출품목인 반도체 산업을 겨냥해서 반도체 핵심 소재의 수출규제를 단행 한 것이다. 우방국가라고 믿고 자유와 민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동맹국가가 행해서는 안 될 조치에 국민은 분노했다. 아무리 전 정부의 일본 배척 정책과 우리 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한 일본의 입장을 백번 이해한다 해도 우리로선 과한 조치였다.일본 경제 산업성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라는 수출심사 우대국의 지위에서 제외하는 조치를 내렸다. 당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핵심 품목 3가지, 일본이 강점을 가지고 있는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산업)의 주요 핵심 부품인 감광액, 고 순도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주요 핵심 부품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일부 주요 부품은 국산화를 이루었고, 세계 시장을 점유한 한국의 최첨단 산업에 오히려 일본 산업이 피해를 봤다. 일본의 일부 회사는 아베의 수출규제 정책에 맞서 회사의 존립을 위해 한국에 공장을 짓는 일도 생겼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본 국민의 심기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한국의 자부심이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을 고사시키려는 행위를 목격했기 때문이다.일본을 적대시하고 사사건건 대립하고 날을 세운 전 정부의 정책도 갈등과 혐한, 혐일을 부추기는데 크게 일조했다. 국가 간의 약속과 협약을 종잇장 구기듯 없던 일로 처리하면서 불필요한 갈등과 양국 간 분열을 야기했다. 일본 측의 반발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한 듯한 느낌이 들 만큼 지난 정부는 중국과 북한에 대한 우호정책과 일본을 배척하는 입장을 취했다. 일본을 두고 같은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지 못하는 나라로 인식하는 국민도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것도 모르는 초등학생 때부터 임진왜란과 독립군, 각시탈,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드라마를 보고 자랐다. 지금도 일본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먼저 거부감이 생기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사실이고 저변의 공감대가 있는 느낌이다.2016년 일본의 자존심이라는 샤프전자회사가 결국 대만 폭스콘에 매각되었다. 당시 샤프의 디스플레이 사업부는 일본의 마지막 남은 알짜 자산으로 유명했다. 일본 간사이 지역의 사카이공장은 대형의 고품질 액정을 생산하는 곳으로 우리의 삼성전자도 탐을 냈던 곳이다. 한국의 SK 하이닉스가 심혈을 기울여 입찰에 참여했고, 마지막 계약단계 까지 갔으나 결국, 한국에는 넘길 수 없다는 일본인의 여론에 밀려 결국 대만으로 향하고 말았다. 또 한편의 이야기는 유명희 통상교섭 본부장의 세계무역기구(WTO)차기 사무총장 후보의 사퇴다. 미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WTO 사무총장 결선까지 진출, 첫 한국인 여성 수장이 나오나 기대가 컸다. 그러나 결국 사무총장 후보를 사퇴하면서 고배를 마셨다.일본의 조직적인 방해와 더 나아가 한국의 세계무역기구 사무총장 도전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모습을 취했다. 수출규제를 놓고 갈등을 겪고 있는 두 나라의 입장에서 당연히 우호적인 지원을 바라는 것은 무리였다. 일본을 배척하는 한국의 사무총장이 탄생할 경우 일본의 통상정책에 불안요소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보면서 느낀 점이 일본이 국제무대에서 우리를 키워 줄 힘은 없을지 몰라도 우리를 훼방할 힘은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본의 방해가 두려워서 일본에 우호정책을 펴고 친일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당한 기억이 있으니 쉽사리 마음을 줄 수도 없음을 이해한다. 사람들이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도 없다.” 라고 하는 점도 백번 이해한다.그러나 미국과 영국이 서로 죽임을 저질렀던 처절한 독립전쟁,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핵폭탄으로 수십 만 명이 죽은 일본, 그러나 이들은 국제무대에서 가장 긴밀하고 협조적인 국가들이다. 이들은 과거의 어두운 무덤에서 빠져나와 미래를 공유하며 자손들의 번영을 위해 손을 잡고 협력하고 있다. 그들도 역사를 잊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방법이 우리와는 차이가 나는 느낌이다. 이미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철강, 의료, 군사, 우주산업과 KF-21 초음속 전투기를 만드는 우리의 국력을 보며 이제 우리에게 일본은 없다. 일본에 대한 피해 의식은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다. 그 대신 자신감과 세계를 아우르는 문화의 힘과 10대 선진국의 일원으로 세계질서를 주도해나가는 힘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이제 ‘노 재팬’이니 ‘토착왜구’니 분열 하며 일본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겐 과거 앞서 나가던 일본의 모습은 없고 우리가 만든, 그리고 그들의 암울했던 그늘과 악몽의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 대신 자유와 민주주의의 공동 가치를 지닌 국가들로서, 양국이 미래를 위해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함께 하는 그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