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당신이 완전한 알몸으로 말을 타고 영지를 한 바퀴 돈다면, 너의 뜻을 헤아려 농노들의 세금을 감할 것을 검토해 보겠다.” 11세기 경 영국 워릭셔주 코번트리 지방의 레오프릭 영주는 평민들을 대상으로 지나친 세금을 거두기로 악명이 높았다. 이런 파행을 보다 못해 행동으로 나선 이가 있었으니 그건 민중의 대표도 우두머리도 아닌 영주의 부인인 고다이바(Godiva)였다. 이 지역의 영주이자 자신의 남편인 레오프릭 백작에게 백성들의 애환을 돌아보고 고혈을 착취하는 것을 멈추길 간청했다. 그러자 영주는 콧방귀를 낀 채 부인이 완전히 벌거벗고 말을 탄 채 마을을 지나가면 세금을 내리겠다고 말했다.당연히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은 영주와 달리 그의 부인 고다이바는 마을 주민에게 이러한 사실과 자신의 의지를 알리게 된다. 그리고 정오부터 오후 2시까지 모두 창문과 문을 닫고 아무도 밖을 내다보지 말아 달라고 했다. 긴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수치스런 곳을 가린 후 천천히 말을 타고 거리를 가로 질렀다. 그 때 그녀의 나이 겨우 16세 이었다. 그녀는 알몸 임에도 불구하고 굴욕감을 느끼기 보다는 너무나 아름다웠고, 또한 고귀하였으며 얼굴에서는 결연한 그녀의 의지마저 읽을 수 있었다. 그 행위의 본래 목적이 영내의 주민을 사랑하고 진정으로 아끼는 애민(愛民)이 그녀의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이 그녀의 우아하고도 도도하며 고귀한 자태로 나타난 것이었다.영내의 주민들은 그 마음에 모두 감동하여 레이디 고다이바가 영지를 돌 때, 누구도 그 알몸을 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모두 창문을 걷어 닫고 영주 부인의 희생에 경의를 표했다. 한 편, 고다이바가 영내의 영토를 도는 동안 궁금함을 참지 못한 마을의 재단사 톰(Tom)은 커튼 뒤에서 이를 몰래 훔쳐보다가 눈이 멀게 된다. 고결한 영주 부인의 결연하고 숭고한 뜻을 추악한 호기심으로 채우려 한 것에 대한 벌이라도 내린 것일까? 사람들은 이 후 남을 몰래 훔쳐보는 행동, 즉 관음증, 성도착증을 말핼 때 피핑톰(Peeping Tom)이라고 불리게 된다. 또한 기존에 전해 내려오는 관습과 상식을 깨는 정치 행동을 고다이바이즘이라고 하며 부인의 고귀하고 결연한 행동으로부터 유래되었다.본디, 역사적으로 여성의 벌거벗은 몸은 풍요로 상징되기도 한다. 풍요의 여신이 말을 타고 마을을 돌며 다산을 기원하는 고대 의식에서도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마저 민중을 위해 희생을 치른 행위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그림은 1898년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존 콜리어의 작품으로 흰 말과 선명하고 붉은 천에 화려하게 자수로 장식된 장식에 앉은 귀족부인의 관능적인 누드화이다.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도 관능적이고 성적매력을 풍기는 여성의 누드라고 보기는 어렵다. 고다이바 부인은 실제로도 존재했던 인물이다. 나체로 거리를 활보한 역사적 기록은 찾기 어려워 후대의 사람들이 지어 낸 것으로 추정되지만,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아름다운 신화임에는 틀림없다.지금도 그렇지만 쉽지 않은 결딴 어려운 사람들의 시름을 들어준 그녀의 숭고한 행동이 역사적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크나 큰 감명을 주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힘겨움에 하루를 살아가기 어려운 취약 계층, 약한 고리, 힘겨운 서민들, 장애와 불구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름을 외면한 정치권은 반성을 해야 한다. 지난 해 9월, 계속되는 코로나 사태로 수많은 자영업자들이 거리두기와 K-방역의 이유로 도산을 하고 그 중 일부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도 많았다. 벼랑 끝에 몰린 자영업자들의 비극적 상황에 어느 곳에서도 재난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하는 사람과 조직은 없었다. 그저 재난 지원금이라는 명복으로 불평등하게 사람들에게 돈을 퍼주며 민심을 달래기에 급급했다.그러나 사람들은 재난 지원금을 받고도 고마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불평등 분배의 문제로 봉착, 시위가 일어나고 집단 갈등을 초래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알지만 급여 생활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신이 낸 세금이 자신 왜 상인들에 지급되는 것을 불편해하는 시각마저 생겨났다. 그 사이에 생을 마감한 자영업자들의 합동분향소도 설치가 되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줄 알지만 힘겨운 백성을 위해 백마를 타고 영내를 도는 고귀한 관리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주민들의 눈을 가리고, 푼돈 몇 푼을 쥐어주며 민심달래기에 급급했고 그것만이 관건이었다. ‘고다이바이즘’, 기존에 내려오던 구태의 관습과 상식을 깨는 정치 행동을 고귀한 정치인은 아무도 찾아 볼 수 없었다.오히려 정치권 모두는 부인의 고귀한 행위 대신 구명 뚫린 창문으로 영주부인의 몸매를 쳐다보기 바빴다. 국민을 위해 헌신적이고 스스로를 버려서라도 나라를 구하는, 살신성인의 행위대신 눈치나 보며 비위 맞추기에 급급했다. 이제는 OO지원금, XX지원금 이라는 단어가 무차별로 그리고 공공연하게 유포가 되어 그 무게를 느끼지 못할 만큼 둔감해져 버렸다. 탈무드에 나오는 ‘고기를 주기보다는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라’는 말처럼, 새로이 들어선 정부는 당리당략의 근시안을 버리고 국민만을 보고 헌신하는 정부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