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친구에게 들었던 웃픈 이야기. 시골 마을에서 함께 지내던 친구가 복날이 되자 제안을 했다. “너희 집 복실이 이번 복날 내게 팔아라. 30만원 줄게.” 그러자 복실이 주인은 주저하지 않고 그러겠노라 하며 구두 계약을 맺었다. 약속한 복날이 왔고 복실이 주인은 복실이를 친구에게 건네주자 근처 숲으로 데리고 가서 나무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몽둥이로 마구 패기 시작했다. ‘복날 개 맞듯이 한다.’는 말처럼 무지막지하게 때렸다. 고기 육질을 연하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하지만, 그게 왜 연해지는 지 당췌 이해할 수가 없다. 과학적 근거도 없지만 백번을 양보해서, 혹 그게 맞는다고 치더라도 안락사 후에 얼마든지 사체를 두들기면 될 텐데,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애처로움도 없었다.얼마나 때렸을까? 줄에 매달린 복실이는 죽을힘을 다해 줄을 풀고 숲 속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자 이때부터 분란이 시작되었다. 오후 느지막하게 복실이 주인이 다가와서 30만원을 요구했다. 그러자 친구는 개를 잡지 못했으니 그 돈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서로 티격태격 실랑이를 하다 둘은 절충안을 모색했다. 개를 잡아서 돌려주면 약속한 30만원과 다리 한 쪽을 주기로 했다. 그리고는 복실이 주인이 숲속을 다니며 복실이를 불렀다. “복실아. 복실아.” 그 목소리를 들은 복실이는 망설이다가 꼬리를 흔들며 주인에게 나타났다. 그러자 주인은 목줄을 단단히 채우고 발버둥치는 복실이를 친구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목줄을 건네며 하는 말. “너. 다리 한 쪽 준다는 약속 어기면 안 된다.”그 끔찍한 경험을 하고도 주인이 부르니까 반갑게 나타난 강아지와 그 강아지를 다시 잡아서 넘기는 사람. 이쯤 되면 누가 사람인지, 누가 개인지 구분이 조금 모호해진다. 필자의 입장과는 달리 뭐 친구와 복실이 주인의 입장이 얼마나 일반적인지는 모르겠다. 이해의 경계선 (똘레랑스, Tolerance)이 얼마나 설정될지 사람마다 온도차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의 사람이 가져야 하는 애처로움과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측은지심은 최소한 보이지 않는다.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 충성스러운 개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일본의 아키타 현의 전철역 앞에 서있는 ‘하치코’ 개 동상이 유명하다. 자기를 기르던 주인이 죽은 뒤에도 역앞에서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일화로 유명해 진 일본 개이다.우리나라에서도 오래 전부터 충견이야기가 많이 들려온다. 고려시대 거령현, 오늘 날 전라북도 임실군에 김 아무개 씨가 살았다. 어느 날 동네잔치에 초대되어 길을 나서다 유독 그날따라 기르던 개가 따라나서 대동을 했다. 잔치에서 걸쭉하게 술에 취해 귀가를 하다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길가 풀밭에서 잠이 들었다. 때 마침 들불이 일어나 김 아무개 씨가 쓰러져 자고 있는 곳까지 불길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 충견은 주인을 깨우기 위해 짖고 옷도 물고 흔들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들불은 다가와 드디어 주인을 덮치기 시작했다. 그 강아지는 급히 인근 냇가로 달려가 자신의 몸을 물에 적셔 주인이 누운 풀밭 주변을 뒹굴었다. 김 아무개 씨가 술에 깨어 일어났을 때는 불은 꺼졌고 숯덩이처럼 쓰러져 죽은 애견만이 있었다.이 사연 말고도 개가 인간과 함께 지내며 이롭게 한 이야기는 숱하게 많이 접할 수 있다. 유사이래. 인간은 개를 길들였고, 개는 인간을 진화시켰다. 인간과 개의 공동의 유대관계는 역사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외국에서는 개를 가축으로 보기보다 가족의 공동체의 일부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아시아권에서는 복(伏)날이라는 것이 있다. 초복, 중복, 말복을 통틀어서 삼복 또는 삼경일이라고 부른다. 한국 뿐 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역서서 ‘사기’를 보면 진이 덕공 2년에 비로소 삼복이 시작되었다고 하며, 조정에서 신하들에게 고기를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복(伏)날의 의미는 사람이 개처럼 엎드려 있는 형상으로 여름철의 더운 기운에 엎드려 복종한다는 의미가 있다.그래서인지, 예전 여름철과 복날이 되면 보신을 하는데, 특히 개를 많이 잡아먹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도 개로 만든 음식을 ‘보신탕’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개고기를 식용으로 하는 나라는 극소수이며, 불행히도 우리는 식용국가의 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개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서구권에서는 그런 우리를 야만인으로 보고 경멸한다. 한편, 국내의 일부 개식용 옹호론자들은 닭과 돼지는 생명이 아니냐는 반론을 펼치며, 우리고유의 음식문화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개고기의 식용이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 문화라는 근거는 없다. 다행스러운 건 요즘 젊은 세대에서 개고기가 식용으로서 거부되고 있어, 명실상부 선진국으로 인정받는 우리가 제3 세대 국가의 초라한 모습에서 빠져 나오는 모양새이다.개식용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걸려있고 논쟁이 심화되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다만, 너무 잘 먹어서 병이 생긴다는 요즘, 예전 먹을 것이 없고, 농사 등 노동으로 체력을 보충한다는 의미는 이미 퇴색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신문사 후배들로부터 존경받는 편집 상무님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휴일이면 꼭 산을 오르신다. 그리고 땀을 흠뻑 흘리고 나서야 한 주간의 업무 준비가 완료된다는 말씀을 해 주신다. 조금씩 소식하고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는 새로운 개념의 복(伏), 그러한 의미를 지금에 다시 살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