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뚜기 마을은 그동안 많은 변화로 시골 마을 전체가 공업단지가 되었다. 몇 년 전만 해도 포항-구룡포 간의 넓은 도로를 달리다가 상정리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좁은 시골길을 10여분 들어가다 보면 성동리 메뚜기 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은 가을이 되면 메뚜기잡기 체험행사를 열기도 하였는데, 남녀노소, 유치원 아이들까지 북적이며 들판에 지천으로 뛰노는 메뚜기를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절이나 서원의 단청에 쓰이는 천연안료인 뇌록(磊綠)이 가득한 200미터 남짓의 아름다운 뇌성산 자락 분지에 위치한 이 마을은 약 30여 호의 가구가 친환경 마을로 지정되어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농법으로 벼농사를 지으며 오순도순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이 지역이 블루벨리라는 국가산업공단에 편입되면서 그 조성공사가 한창이어서 메뚜기 마을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 넓은 벌판은 대형장비와 공사차량으로 붐비고 있으니 머지않아 크고 작은 공장이 들어설 것이며 새로운 터전에 이주단지가 생긴다 하더라도 다시는 옛날과 같은 아늑한 자연부락이 들어서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비록 메뚜기 마을은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 고장은 우리 포항시민들이 눈여겨 볼 만한 충절의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날에도 그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 마을은 영천 황보씨 가문이 어울려 살던 집성촌이었는데, 오랜 유교국가의 계급사회에서도 신분제를 뛰어넘어 노비를 위해 세운 비석이 있기 때문이다. 황보씨 가문은 후백제의 견훤군사를 물리친 공으로 고려 왕건으로부터 황보 능장이 영천부원군(永川府院君)의 공신작호를 받으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여 세종, 문종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영의정 황보 인(皇甫仁) 대에 이르러 가문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황보 인과 김종서에게 어린 세손(후일의 단종)을 잘 보필해 달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고명대신이던 황보 인이 계유정난으로 수양대군(훗날 세조)에 의해 척살되면서 삼족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바로 이때 여종(女婢) 단량(丹良)은 목숨을 걸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보 인의 태어난 지 100일 밖에 안 된 갓난 손자(황보 단)를 물동이에 숨겨 천릿길을 걷고 또 걸어 경상도 영일 땅 동해안 구룡포 대보리 짚신골에 숨어들었다. 이후 4대를 짚신골에 살며 겨우 목숨을 보전하다가 그 후 현재의 성동리 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황보 인은 세조에 의해 역적으로 몰린 지 290여년이 지나서야 역사적 평가에 의해 신원이 되었고, 영남의 선비들은 세덕사라는 사당을 짓고 그 후 사액을 받아 광남서원이라는 서원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때 충비 단량의 공덕을 기린 비석(忠婢丹良之碑)도 동시에 세워진 듯하다. 황보가문에서는 자신들의 대를 잇게 해준 단량에 대하여 대를 이어 고마움을 표하는 한편 인간존중과 충절의 정신을 자자손손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함께 새겨둔 것으로 생각된다. 단량의 충심어린 결단에는 황보가문의 인간 평등의식과 내면적 가치를 존중하는 가풍(家風)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실리에 치중하고 신의와 절개는 경시되는 물질만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에 있어서, 단량의 충절은 우리들의 가슴에 휴머니즘을 상기시켜 주는 생생한 징표로 작용한다. 후세에 나라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면 자신을 던져 국가를 구해내는 애국애족의 정신을 이어가야 할 우리들에게 단량과 같은 충절은 의미 깊은 정신적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비록 단량의 행동이 양반과 천민이라는 신분사회체제 안에서 이루어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하더라도 단량의 아름다운 삶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사회나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데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광남서원의 담벼락 밑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200여 년을 견뎌온 - 단량의 혼이 서린 - 조그만 돌비석, 언제 어떻게 망가지고 훼손될지 모를 일이다. 그 역사적 가치를 살펴 문화재로 지정하는 등 공적인 보호를 해야 하지 않을까. 단량의 넋이 외롭지 않도록 잘 보존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초여름비 부슬 부슬 내리는 날, 단량의 충비 앞에 늦게 핀 무궁화 한 송이, 그 붉은 속잎이 단량의 단심(丹心)처럼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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