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7월 제2종합제철소, 지금의 광양제철소 설립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설치됐다. 당시 제2제철소의 입지로 한국과학기술원이 낙동강 하구를, 건설부는 아산만, 광양만 등을 예비 조사했다. 1978년 대림·삼환·동아·현대 등 조사용역업체로 선정된 4개 건설 회사들은 현대는 아산만 옆 가로림만을 추천했고 나머지 업체들은 아산만을 추천했다. 1979년 7월 아산만이 제2제철소 입지로 공식 발표되자 박태준 명예회장은 즉시 아산만에 현장사무소를 설치하고 입지에 대한 정밀조사를 들어간 결과 조수간만의 차이가 커 향후 제철소 가동에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제철소 입지가 뒤바뀔 중요한 시점인 당시 1979년 10월26일 포항제철에게, 특히 박태준 명예회장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다. 박 대통령의 후원과 보호가 있었기에 포항제철은 경영상의 자율권을 가지고 장기전략, 인사정책, 각종 계약 등을 외부 간섭 없이 처리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포항제철은 제철소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또 포항제철소의 성공으로 철강을 소비하는 한국의 자동차, 건설, 조선 등의 산업이 세계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가지게 된 가장 중요한 원인 또한 박 대통령의 후원과 보호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전국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아산만 조사팀을 해체하고 다른 입지를 물색하게 하는 등 특히 광양만에 대한 재조사를 지시했다. 건설부는 1974년 이미 아산만을 선정했기에 포철의 재조사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고 일본전문가들의 조사를 토대로 광양만 지반 강화비용을 포철이 추정한 1억5천만 달러의 6배인 10억 달러로 추산하며 광양만을 기각시키고 아산만을 최종 부지로 결정했다. 그러나 박태준 명예회장은 1982년 11월 하순에 청와대를 방문해 9미터의 조수간만의 차이와 갑문제작의 문제, 북한의 공격으로부터 취약하다는 단점 등을 설명하고 광양만을 제2제철소로 입지를 선정하도록 설득했다. 결국 박태준 명예회장의 노력과 설득이 받아들여져 10여년만인 1982년 9월8일 드디어 광양제철소가 착공됐다. 바다와 금호도를 매립해 450만평의 반도를 만들어 4단계로 건설된 광양제철소는 3기공사까지 270만톤, 1990년에는 810만톤, 4기 공사로 연산 330만톤을 확장해 1992년 10월 완공됐다. 광양제철소의 완공으로 포항제철은 연산 2050만톤의 생산능력으로 세계 3위의 제철소로 올라섰다. 영일만 모래바람을 이겨낸 박태준 명예회장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포항제철이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기 위해서는 제철소 건설단계부터 경쟁력을 가져야 하고 장비, 건물 및 인프라 등의 고정비를 줄일 수 있다면 충분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박태준 명예회장의 생각은 ‘최대로 생산해 최저 가격으로 공급하자’는 포항제철의 경영정책으로 이어져 한국 제조업체들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부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양 제1기공사가 완료된 1987년 5월13일 박태준 명예회장은 철강업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베세머 금상’을 수상했다. 영국 금속학회가 수상하는 이 상은 1874년 영국의 철강기술자인 헨리 베세머가 철강 산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거나 혁신적인 철강제조 기법을 개발한 사람들을 기념하려 제정한 상이다. 당시 철강업계는 세계에서도 박태준 명예회장이 이뤄낸 포항과 광양제철소의 업적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의미로 평가하고 이를 크게 반겼다. 또 1992년에는 세계 철강업의 발전과 환경보존에 대한 공로로 윌리코프상을 수상받고 독일, 칠레, 브라질, 호주, 노르웨이 등의 나라로부터 최고훈장과 세계 각국 유명대학의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는 등 세계적인 인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68년 세계은행의 선임연구원으로 당시 한국의 제철소 건설에 부정적인 의견을 내렸던 자페는 1986년 로마 국제철강협회 연차총회 후 저녁식사자리에서 “절대 잘못된 보고서를 쓰지 않았고 다만 한국에 박태준 회장이 있었다는 것은 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포항제철의 성공은 스탠포드, 하버드, 서울대학교 등 세계일류대학 연구소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으며 연구과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들은 포항제철의 성공비결을 ‘저비용으로 고품질의 제품 생산을 목표로 하고 삼고삼무(三高三無) 즉 최고의 생산성, 최고의 품질, 최고의 낮은 비용, 무결점, 무사고, 무낭비’라고 발표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혼이 깃든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는 이제 세계 속에 자리 잡은 포스코로 발전했다. SAM-DJSI의 철강부문 평가에 참가한 세계 총 44개사 중 포스코, 라우타루우키(Rautaruukki Oyj·핀란드), 아르셀로미탈(룩셈부르크), 아페람(Aperam SA·룩셈부르크), 오우토쿰푸(Outokumpu Oyj·핀란드) 등 5개 기업 등과 같이 7년 연속 세계우수기업으로 선정되는 등 지속가능경영 선도기업의 위상을 굳건히 다지는데 성공했다. 포스코는 현재 국내 61개사와 해외 21개 회사를 보유한 세계적인 철강그룹사로 활발한 기업 활동 등을 통해 그 존재가치를 세계만방에 떨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박태준 명예회장의 탁월한 비전과 능력, 청렴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높은 도덕성이 있었기 때문에 포스코의 전 직원들도 포스코의 조직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의 몸과 마음을 다 바치는 보답을 했다고 평가된다. 또 포스코의 창업 과정에서 보여 준 박태준 명예회장의 열정과 헌신은 한국적 발전체질의 가장 이상적 조합이며, 그 산물이 바로 포스코의 위대한 성취를 일궈 낸 토양이 됐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박태준 명예회장은 지난 30년은 포스코가 한국의 산업토양을 빚어냈다면 이제부터 30년간은 한국의 세계화를 선도해 나가기를 당부했다. 박 회장의 당부처럼 포스코는 세계화 시대를 맞아 새 지배구조와 함께 기업경영의 모든 면에 걸친 대혁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청암 박태준 명예회장이 생전에 남긴 “두 번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는 교훈을 남겼다. 이를 바탕으로 포스코는 항상 새로운 성장의 엔진을 창출하고 배양해 100조원의 매출을 올리는 비전 2020에 도전하고 있다.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라는 칭송을 받았던 박태준 명예회장은 기업인으로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고 한평생을 청렴하고 올곧은 성품으로 살았던 이른바 이시대의 철인(鐵人)으로 우리에게 남았다. 2011년 12월17일 대한민국의 국민과 세계의 기업인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사회장으로 엄수된 박태준 명예회장의 영결식에 정부는 그를 애도하며 국가발전에 최고의 기여를 했다며 최고등급 훈장인 청조근정훈장을 수여했다. 강신윤기자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 제보하기
[메일] jebo@ksmnews.co.kr
[카카오톡] 경상매일신문 채널 검색, 채널 추가
유튜브에서 경상매일방송 채널을 구독해주세요!
댓글0
로그인후 이용가능합니다.
0 / 150자
등록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이름 *
비밀번호 *
비밀번호를 8자 이상 20자 이하로 입력하시고, 영문 문자와 숫자를 포함해야 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복구할 수 없습니다을 통해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
  • 추천순
  • 최신순
  • 과거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