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2월 시작된 파병은 총 32만5,217명, 이 중 전사 5,099명, 부상자 1만1,232명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다. 특히 맹호부대를 비롯하여 청룡부대, 백마부대 등 참전 군인들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전투수당과 여타 지원금은 총 66억 달러로, 당시로서는 상상도할 수 없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한국군의 전투력에 전 세계가 놀랐다. 1967년 2월 15일에 있었던 “짜빙동 전투”는 신화 그 자체였다. ‘쾅과이’ 지구에 해병 청룡부대 11중대가 주둔하자, 기선을 잡기 위해 월맹의 최강부대인 2사단 산하의 3개 대대가 일제 공격을 단행했다. 이 전투에서 1개 중대 병력으로, 적 3개 대대를 섬멸함으로 “짜빙동 전투”는 세계전사에 길이 빛날 금자탑을 세웠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거둔 전과는 제대로 된 무장만 갖추면 세계 최강의 군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만방에 증명했다. 미국의 한 종군기자는 한국을 가리켜 ‘아시아의 이스라엘’ 이라고 하였다.
비단 청룡부대만이 아니었다. 맹호부대를 비롯하여 백마부대, 비둘기부대 등 파병 전투병들의 전적은 전 세계가 경악할 정도로 찬란하였다. 아시아의 조그마한 나라, 수천 년 동안 강대국들에게 시달리면서 연명하던 나라라고 인식하였던 Korea가 이렇듯 저력을 가진 국가인지 몰랐다고 세계 전사(戰史)에서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그 빛나는 공적은 사라지고,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양민이나 학살한 몹쓸 용병이라고 한국인들이 떠벌리고 다니니 세계가 어떤 평가할까? 한국군이 월남에서 정말 양민을 학살하였을까? 베트콩이 군복 입고 전쟁하는 군대인가? 필자와 절친하였던 청룡부대 한 지휘관의 증언이다. “시골길을 따라 부대가 이동하고 있는데, 밭에서 일하고 있던 월남 국민들이 “다이한” “따이한” 하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한국군은 주둔지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대민사업에서 월남 국민들에게 진정으로 봉사하였고, 월남 국민들도 파병 국가 군인들 중에서 한국군을 제일 좋아하였다. 그렇기에 응당 친근한 인사라고 생각하고 같이 손을 흔들어주고 지나가는데 총소리가 들렸다. 맨 뒤에 오던 한국군 군사 2명이 쓰러졌다. 그런데 돌아서서 “누가 총을 쏘았느냐”고 물어보고, 전쟁하느냐? “양민은 오른 편에, 베트콩은 왼편에 서시오” 하고 전쟁하느냐? 베트콩은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전쟁하는 군인들이다. 누가 베트콩인지, 양민인지 분간할 수도 없고, 총알이 날라 오는 쪽으로 향해 전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 게릴라전이다.
한국의 좌익들은 통일된 베트남에 가서 한국군의 양민학살 실태를 조사한다고 설치고 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죄하라고 지껄이고 있다. 헌데 진작 베트남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바로 양민학살이란 말이라고 한다. 한국군의 높은 전과를 인정한 미국은 참전 대가로 10만 달러의 경제지원과 35억 달러의 차관을 공여하여 주었는데 당시로서는 달러가 국가운명을 좌우하는 최고의 가치수단이었다. 이 달러가 경제개발에 지주가 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월남전에서 우리 군인들이 흘린 땀과 피의 대가는 한국군의 현대화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을 뿐 아니라 이제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경제에 가속화를 이루는 윤활유가 되었으며 우리 경제가 세계로 뻗어가는 토대를 이룬 것이다. 월남에서 우리는 단순히 군사전쟁만 한 것이 아니라 경제전쟁도 병행함으로 목숨과 같았던 달러를 벌어들었으며,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노하우(Know how)를 축적함과 동시에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경험들이 ‘중동특수’를 쟁취하는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는데 더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미국이 월남전에서 사용한 전비는 국내 사정으로 일부 축소되었다는 의혹이 있지만 미국 정부의 공식 발표는 6,500억 달러로 제1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전비를 사용하였으며 이것을 두고 “월남 특수”라고들 한다.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패전의 늪에서 재기하듯이 우리도 이 전쟁을 우리 것으로 만들면서 취약한 국내 경제기반을 확고히 다졌을 뿐 아니라 중화학 공업의 꿈을 키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