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농촌에도 전기가여기서 특별히 언급할 것은 농촌의 “전화(電化)사업”이다. 1964년 한국의 농촌 전기 보급율은 12% 정도, 농민 8 가구당 1 가구만이 전기의 혜택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서독 정부의 국빈 초청을 받고 갔을 때 농촌의 풍요로운 모습을 보고 몹시 부러워하면서 특히 농촌의 전화사업이 100%란 설명에 자극되어 귀국하자마자 바로 농촌 전화사업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사업 첫해인 1965년에 5만 3,000호에 전기를 가설하기로 되었는데 3만 8,000호에 그쳤다. 공사가 부진한 것에 대노한 대통령은 그 원인을 밝히라는 지시에 따라 조사한 결과 옥외 가설비는 정부가 부담하고 옥내 공사비는 수혜자인 사용자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인데 너무 가난하여 80달러밖에 되지 않는 자기부담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수혜를 포기한 것이다.박 대통령은 법적 보장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1965년 12월 농어촌 전화촉진법을 제정하여 1년 거치 19년 분할상환이란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나 당시의 농촌 형편으로서는 이것마저도 불가능하여 1967년 3월 다시 법을 개정하여 5년 거치 30년 상환조건으로 농촌의 문화생활을 시작하도록 한 것이다. 결국 35년간 갚게 됨으로 물가상승을 계산하면 정부가 보조하는 것과 같은 것이 되었다. 5. 세상이 바뀌다 의식이 풍족해야 예절이 있다는 고사와 같이 삶이 풍요로워야 인정도 있는 것이지 가난하면 조그마한 일에도 시비를 하고 분명히 마을에 이익이 되는 일에도 나한테 이익이 없으면 외면하고 나보다 옆 사람이 잘되는 것은 보기가 거북한 것이 우리 내 사정이었다. 그래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묵시적 인습이었는데 사촌이 논을 사면 내가 논을 사는 것처럼 기쁜 마음을 갖고 축하하는 풍토가 조성됨으로 화합의 정신을 갖게 되는 것이 협동이다. 협동정신은 상부상조의 정신을 토착화 하는 결과를 낳았는데 이러한 개혁의 실천의지로 새마을 운동이 지속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 공동체가 형성되고 개혁이 성공적으로 확산된 것이다. 새마을운동의 성공은 변방에 머물던 농민들이 국민의 중심세력에 당당히 편입되면서 자신감과 긍지를 갖게 되었고 “하면 된다.”는 실천 의지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긍심으로 변화되었을 뿐 아니라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승화되어 한국 농촌은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였다.  오늘의 한국 농촌이 선진국형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동인은 정책의 확신성과 착오를 허용하지 않은 치밀한 기획과 특히 당시 공무원들의 헌신적 노력이 크게 기여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새마을 지도자들의 희생적인 봉사가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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