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에 취업한 우리 광부와 간호사들이 본국에 송금한 총액은 연간 5000만 달러, 이 금액은 당시 한국의 국민소득의 2%를 차지하는 엄청난 금액이었으며, 이 달러가 고속도로와 중화학공업에 투자되었다. 이후 한국과 서독 간에는 금융 문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진정한 우방이 되었다. 서독에서 피, 땀 흘린 광부와 간호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조국근대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위대한 ‘국가유공자’들임에도 우리들은 그들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국가는 당연히 그들에게 ‘국가유공자’로 대우하여야 한다. 아우토반, 1920년대 말, 히틀러가 만든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다, 히틀러는 이 도로를 전쟁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만 이 도로가 있었기에 2차 세계대전 후 독일 경제부흥의 초석이 된 것이다. 이 도로를 달리던 우리 대통령은 세 번이나 차를 세우고서 도로 상태를 면밀히 조사하면서 울었다는 것이다, 2. 산업동맥 - 고속도로 “왜 고속도로를 보면서 우시는가?” 하고 물으니, 우리 트럭 기사들이 생각나서 우셨다는 것이다. 독일 기사들은 이 좋은 도로로 아무런 장애 없이 잘도 달리는데 우리 트럭 기사들은 서울에서 부산 까지 수출품을 실고, 먼지를 덮어쓰면서 13시간 이상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독일에서 돌아와 시작한 것이 경부고속도로 착공이다. 1968년 2월 1일 착공하여 1970년 7월 7일 준공된 이 도로는 박 대통령의 의지이기도 하였지만 에르하르트 총리가 한국이 경제개발을 하려면 고속도로와 제철산업은 필수적이라는 적극적 권유가 있었던 것도 하나의 동기가 된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적 기록을 갖고 있다. 가장 저렴한 건설비, 1㎞에 3억 원이 소용되는 건설비용을 1억 원으로, 9년이 소요되는 공사 기간을 3년으로 단축하였으며 외채는 한 푼도 사용하지 않고 독일에서 광부, 간호사들이 보내는 년 5‘000만 달러와 대일청구권자금 중 689만 달러 등 순수한 국내자본으로 건설된 것도 기록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고속도로였기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보수공사를 한 것도 신기록인데 아마도 고속도로가 서 있었더라면 와우 아파트처럼 붕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 정상적 공법에 의한 예산 투입을 시도하였다면 착공 자체가 불가능 하였으며, 더욱이 고속도로와 같은 대형공사의 경험은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파따야 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이 전부였다. 물론 적자를 봤지만, 이 경험이 전부인 상태였기에 박 대통령이 건설 현장을 직접 누비면서 진두지휘하지 않았다면 준공은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 때 고속도로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 경제가 이렇게 발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경제는 물류 이동이 원할 해야 한다는 기초 경제학도 몰랐고, 사실 농업 국가이며 국토가 좁은 한국에 왜 그런 넓은 도로가 필요 하느냐 하는 것이 당시 국민들의 물음이기도 하였다. 이런 분위기는 야당 지도자들에 의해 더욱 확산되었다. 그들은 ‘자가용 족속들에게 편리한 도로를 만든다’고 선동하면서 반대 유세를 전국적으로 전개하였을 뿐 아니라 착공식 당일 행사장에서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국가발전의 비전이 없는 당시 야당 정치지도자들의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