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주요 도시에서 24일 총선 부정을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가 또다시 열렸다.
이날 집회는 지난 10일 러시아 전역에서 수만 명이 시위를 벌인 데 뒤이은 것으로, 앞서 4일 치러진 총선 이후 계속되고 있는 야권의 선거 부정 항의 시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 "모스크바 최대 12만 명 운집" = 모스크바 북쪽 `사하로프 대로`에서 오후 2시(현지시간)부터 개최된 집회에는 경찰 추산 2만9천 명, 주최 측 집계 12만 명이 참석했다. 최근 20년 사이 최대 규모의 집회였다.
집회장 주변에는 경찰과 대(對) 테러부대 `오몬` 요원들이 대규모로 배치돼 질서 유지에 나섰으나 시위 자체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시위 과정에서 경찰과 시위대 간 충돌 사태도 일어나지 않았다.
리아노보스티 통신 등에 따르면 제2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피오네르 광장`과 `사하로프 광장`에서도 약 2천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선거 부정 규탄 시위가 열렸다. 이밖에 모스크바 인근 도시 야로슬라블, 서부 시베리아 도시 바르나울, 남부 도시 크라스노다르, 극동 블라디보스토크 등 주요 도시들에서도 수백 명이 참가한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가자들은 대부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블라디미르 추로프 사퇴와 총선 재실시 등을 요구했다. 일부 참가자들은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야권의 대규모 시위는 지난 4일 총선 이후 3주째 계속되고 있다. 시위대는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내년 3월 4일 대선 때까지 저항 운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오후 2시 집회 시작 몇 시간 전부터 끊임없이 몰려들기 시작한 시위대는 수백m에 이르는 `사하로프 대로`를 구름처럼 가득 메웠다. 시위 참가자들은 경찰이 집회장 입구에 설치한 금속탐지기를 통과해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있을지도 모를 폭발물 테러 등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주변에 배치된 경찰과 대 테러부대 `오몬` 요원들은 시위 참가자들이 정해진 길을 따라 집회장으로 이동하도록 통제했을 뿐 다른 제재는 가하지 않았다. 집회장 상공에선 집회 시작 전부터 헬기 1대가 계속 날며 현장 상황을 감시했다.
◇ "총선 재실시, 푸틴 퇴진" 등 요구 = 집회는 저명한 야권 지도자 블라디미르 리슈코프의 연설로 시작됐다. 리슈코프는 "앞서 10일 크렘린궁 인근 `늪 광장` 집회에서 채택했던 (7개항의) 결의안 가운데 정부가 이행을 약속한 것은 선거제도 개혁뿐"이라고 운을 뗀 뒤 "내년 3월 대선을 감시할 시스템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또 다른 대표적 야권 인사 보리스 넴초프는 "푸틴을 크렘린으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 도둑이 크렘린궁에 앉아있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지난 9월 메드베데프 대통령에 반기를 들었다 쫓겨난 알렉세이 쿠드린 전(前) 재무장관도 연단에 올랐다. 그는 연설에서 중앙선관위원장 사퇴를 요구하면서도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는 대신 조기 총선을 실시하자고 제안했다.
앞서 시위 과정에서 체포돼 15일간 구류를 살고 석방된 유명한 인터넷 논객 알렉세이 나발니도 연설에 나서 총선 부정 시위를 주도하는 야권 인사들을 서방 세력에 놀아나는 `원숭이`에 비유한 푸틴 총리를 강하게 비난했다.
이날 집회장에는 또 재벌 기업인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해 관심을 끌고 있는 미하일 프로호로프도 모습을 드러냈으나 연단에 오르진 않았다. 그는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집회장을 찾았으며 원래부터 연설할 계획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프로호로프는 현장에서 야당 성향의 라디오 방송 `에호 모스크비(모스크바의 메아리`)와 한 인터뷰에서 "대통령이 되면 의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당이 원내에 진출할 수 있도록 새로운 총선을 치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집회 마지막 무렵 시위 참가자들은 야권 지도자 리슈코프의 선창에 따라 "푸틴은 물러가라", "러시아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뒤이어 리슈코프의 결의안 낭독으로 약 3시간 30분 동안 이어진 집회가 막을 내렸다.
결의안에는 내년 대선에 출마한 푸틴 총리에게 투표하지 말 것, 총선 부정 조사와 내년 대선 감시를 위한 모스크바 유권자 연합체를 창설할 것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시위 주최 측은 또 지난 10일 크렘린궁 인근 `늪 광장` 집회에서 채택했던 결의안 내용을 정부가 이행하지 않았다며 이날 결의안에 다시 포함시켰다.
시위 과정에서 체포된 야권 인사 즉각 석방, 총선 결과 무효화, 중앙선관위원장 사퇴, 선거 부정 수사 및 책임자 처벌, 비공식 야당 공식 등록, 민주적 선거법 채택, 공정하고 개방된 총선 재실시 등이었다.
◇ "내년 초 다시 집회 열 것" = 야권 지도자들은 이날 집회에서 새해 연휴가 끝나는 대로 다시 시위를 열겠다고 밝혔으나 시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제안을 했다.
일부 지도자는 내년 1월에 다시 집회를 열자고 제안했고 다른 지도자들은 2월을 제안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정부가 자신들의 요구 조건을 이행할 때까지 집회를 계속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찰은 이날 집회에서 아무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체포된 사람도 없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야권의 총선 부정 규탄 시위가 내년 3월 대선 선거 운동과 맞물리면서 정국 혼란 사태가 한동안 이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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