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의 기적은 한국의 기적이었다.
포항제철 1기공사에는 3500만 명의 인원과 7만6000일 분의 건설장비가 동원됐고 8만2000개 이상의 기계들이 공장에 설치됐다.
약 50만 m³의 콘크리트가 타설됐고 2만7000개 이상의 콘크리트 파일과 2만8000개의 강철 파일들이 땅에 박혔다.
가장 주목할 점은 제철소 주요 건설공사들이 계획보다 평균 2개월 이상 앞당겨 준공된 점으로 이는 제철소 건설에서 공기가 하루라도 지연되면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지만 하루라도 앞당기면 총비용이 절감돼 경쟁우위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게 된다.
당시 첫 출선을 맞아 만세를 부르는 사진들이 포항제철의 신화를 대변하는 모습으로 남겨져 있다.
박 명예회장은 첫 출선을 맞은 기쁨의 순간에도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일들을 미리 내다보고 첫 출선이 험난한 여정의 첫 출발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며 작은 불량 작업이 모든 것을 무너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며 문제가 생기면 즉시 시정하고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또 “안전이 제일이다”며 사소한 부주의가 기업뿐만 아니라 나라경제 전체에도 커다란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했다.
포항제철소는 1973년 7월 첫 가동이후 첫해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액과 1200달러의 순이익을 달성하며 세계 철강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달성했다.
1973년 재무부와 경제기획원에 제출한 연차보고서를 본 김학렬 부총리는 이 수치를 믿을 수 없어했고, 이를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박 명예회장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수여하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1974년 포항제철소는 2억5800만 달러의 매출액으로 8800만 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하며 대한민국의 첫 종합제철소로서 순항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이처럼 이익이 급가속을 낼 수 있었던 비결을 두고 포항제철소 초기 멤버들은 “구매협상이나 입찰 전에 철저한 준비로 최저 가격으로 설비를 구입했고 조기완공을 통해 공사비를 절약했고 예정보다 빨리 제품을 출하한 때문”이라고 말한다.
또 “이를 대비해 공장가동을 준비하는 3여 년 동안 600명이 넘는 기술자, 관리자, 원료담당자 등이 일본, 미국, 서독, 호주 등에서 공장가동에 필요한 훈련을 받아 조기에 적응할 수 있었고 이들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사명감으로 업무에 임했다”고 덧붙였다.
이와 더불어 박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으로 이루어진 주택, 학교, 병원, 여가시설 등 종업원들의 주거문제, 학교, 건강문제 등이 해결돼 종업원들이 회사 일에 몰두하게 된 점 또한 큰 비결로 손 꼽혀지고 있다.
한국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최우선과제로 포항제철의 2기 확장공사를 선정했다.
이에 따라 1973년 12월1일 포항제철소 2기공사 착공식을 시작으로 2254m³인 제2고로, 소결공장, 코크스공장, 100톤 규모의 LD전로, 연주설비, 기존의 열연공장 확장, 연산 52만 톤 규모의 냉연공장 등 약 3년여 만인 1976년 5월31일 2기 설비의 가동을 맞이하게 됐다.
제1고로 점화식에 참석하지 못했던 박대통령은 이날 5년 전 황량한 벌판에서 가옥이 철거되는 광경을 떠올리며 포항제철이 이룬 업적에 대해 가슴이 벅차오른 감회를 느꼈다고 전했다.
제2고로의 가동으로 포항제철은 제품 구성비율면에서 열연과 냉연 등 박판비중의 증가로 1976년까지 박판 내수의 약 55%를 공급하게 됐고 포항제철의 260만 톤을 포함해 연산 400만톤의 생산능력으로 당시 약 320만 톤의 생산능력을 가진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1968년 포항제철이 설립된 후 포항은 연평균 7.5%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는데 당시 한국 도시의 대부분이 연평균 1%의 증가율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폭발적인 성장률이었다.
제1기, 2기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포항제철은 연산 290만 톤의 제 3기공사를 완공해 2배 이상의 생산규모 확보를 통해 총 연산 550만 톤을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당시 제철소 부지로 조성됐던 총 230만평의 부지는 추가확장 설비 설치를 위해선 협소해 형산강을 400m 북쪽으로 굽어 들게 해 12만평을 확보하고 냉천을 남쪽으로 틀어서 10만평을 확보했다.
하천에서 준설한 흙으로 부지를 메워 전경이 완전히 달라진 공장부지에 세워진 세계에서 가장 큰 작업용적인 3759m³의 제3고로는 1976년 8월2일 착공해 1978년 12월8일 준공됐다.
이를 통해 제2제강공장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컸고 1제강공장보다 3배 이상 큰 300톤 규모의 전로2기가 세워졌고 12개 단위공장과 11개 부속시설, 와이어로드와 전기 강판 등 새로운 제품을 생산할 설비가 추가됐다.
3기공사를 완공을 앞둔 1978년 12월,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사장과 환담을 두고 유명한 일화가 소개됐다.
그해 8월 중국의 덩샤오핑이 일본 기미츠제철소를 둘러보고 이나야마 사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소와 같은 제철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이나야마 사장은 “중국에는 박태준과 같은 사람이 없어 불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하니 덩샤오핑은 “그러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결국 박태준 명예회장의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한 집념과 추진력, 결단력, 애국심이 일본을 비롯한 중국까지 알려졌다는 얘기다.
3기공사를 시작할 무렵 중동건설 붐으로 건설기능공의 부족 현상이 나타나 결국 공기가 예정보다 늦어지기 시작했다.
공기 단축을 위해 박태준 명예회장이 내린 일련의 비상조치는 일일목표를 점검하는 ‘목표통제시스템’, 공사 진행 및 상황을 감독하는 ‘특공대’, 현장보고를 받은 ‘비상대책상황실’, ‘조업 및 정비요원 현장투입 프로그램’ 등이다.
박 회장이 내린 비상조치로 생겨난 ‘유령 노동자’라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당시 프로젝트 규모가 워낙 컸고 많은 인원들이 한꺼번에 여러 현장에서 일하고 있어 현장에 몇 명이나 있는지, 누가 일하고 있는지 가려낼 수 없었다고 한다.
제강공장 현장에서 인원수를 헤아린다는 소문이 돌자 고로설치 현장과 쓰레기 처리장 등에서 수십 명의 노동자가 자전거를 타거나 숨이 차도록 뛰어서 제강공장 건설현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바로 ‘유령노동자’로 시공사들이 지난 수개월 동안 작업인원을 20%가량 부풀려 속여 왔기 때문에 공기지연의 원인이 되고 있었다.
박 명예회장이 내린 일련의 비상조치가 또 하나의 웃지 못 할 일화를 탄생시킨 것이다.
피와 땀으로 얼룩진 제3기 설비는 1978년 12월8일 완공을 맞게 됐고 이에 따라 한국의 총 철강생산 능력은 총 715만 톤으로 세계 17위의 철강국가로 550만 톤 이상의 대형 제철소를 보유한 11번째 국가가 됐다.
설비확장을 위한 4기 공사는 2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1979년 2월1일 착공된 1단계는 총 생산능력 850만 톤을 목표로 외자 6억6600달러, 내자 7억2600만 달러 등 총 13억9000만 달러가 투자됐는데 이 가운데 내자 6억1700만 달러는 포항제철소가 직접 조달했다.
이때 역사상 처음으로 포항제철소 직원들이 포항제철소 4기 공사의 설비설계, 엔지니어링 전 과정을 관장해 제철설비 국산화 시도라는 의의를 가지게 됐다.
1981년 9월2일 착공된 2단계 공사는 고로를 추가하지 않고 60만 톤을 증강하기로 결정됐다.
이에 따라 2고로, 2제강공장을 비롯한 13개 설비의 능력향상을 가져왔고 제5코크스공장, 2선재공장이 신설됐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1기공사에 대한 노력은 2기공사부터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완전히 해소시켰다.
내조 조달비율 또한 계속 높아졌는데 2기(36.4%), 3기(44.6%), 4기(54.2%)로 정부의 보증 없이도 융자를 해주겠다며 경쟁할 정도였고 전 세계 금융기관들의 평가도 좋아져 자금조달에는 탄탄대로를 걸었다.
박태준 명예회장의 ‘우향우 정신’이 빚어낸 제철부국(製鐵富國)의 업적을 국내는 물론 전 세계가 인정을 했다는 것이다.
강신윤기자
max0709@ksm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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