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서연은 결국 산산이 부서지고 무너져내린 끝에 사라졌다. 흙으로 돌아간 그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을 테고 더는 다른 이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도 됐다. 생전 남에게 폐 끼치는 것에 치를 떨었던 그다. 하지만 그가 남기고 간 한 떨기 피붙이와 그가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간 가족들은 ‘아직은…’이라며 상처가 여전하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제부터’새로운 고통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드라마는 말한다. ‘이런 사랑도 있다’고. 또 ‘이런 사랑을 했다고 과연 불행했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SBS ‘천일의 약속’이 지난 20일 여주인공 이서연의 죽음으로 막을 내렸다. 마지막회 시청률은 19.8%. 자체 최고 기록이다. 수도권 시청률은 20.4%로 20%를 돌파했다. ◇알츠하이머…나를 잃어버리는 시대 = `천일의 약속’은 정통 멜로가 사라진 안방극장에서 사랑 본연의 이야기가 여전히 유효할 수 있음을 증명해보였다. 그리고 그 일은 칠십을 눈앞에 둔 베테랑 김수현(68) 작가가 해냈다. 수십 년간 녹슬지 않는 감각을 과시하며 언제나 `현재 진행형’임을 보여줬던 김 작가는 젊은 여성의 알츠하이머라는 아직은 낯선 장치를 중앙에 배치하는 전법으로 정통 멜로의 낡은 틀을 초장에 무너뜨렸다. 여성 시청자들은 드라마가 뚜껑을 열자마자 이서연을 연기한 수애에 곧바로 감정이입을 했고 드라마는 일명 ‘내가 수애야’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런데 좀 더 들여다보면 이 작품은 알츠하이머 너머 나를 잃어버리는 시대에 대한 두려움과 쓸쓸함을 담아냈다. 이는 요즘 문학의 기류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나 최인호 작가의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그렸던 ‘치열했던 삶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처연함’혹은 ‘익숙했던 현실이 한순간에 낯설게 느껴지는 분열과 망각의 두려움’을 계속 일깨웠다. 고아나 다름없이 자라 남동생과 죽을 둥 살 둥 살면서 이제 겨우 빚을 청산한 30대 초반 어여쁜 아가씨 이서연은 깔끔했고 똑똑했다. 하지만 이제 보상받아야 할 때에 그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잃어버렸고 종국에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위해 할지도 모르는 위험성과 똥 기저귀까지 차는 처참한 신세로 바닥을 치고 나서 생을 마감했다. 김수현 작가는 이렇듯 문학이 담아낸 화두를 20부작 TV 드라마로 옮겨와 ‘나를 잃어버린, 혹은 잃어버릴 수 있는 시대’에 대해 대중이 한 번쯤 생각해보게 했다. ◇사랑, 천천히 곱씹어 음미하다 = “내일은 오늘보다 5천200배 더 사랑해”. 이런 닭살스러운 대사가 ‘천일의 약속’에서는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겁고 슬프게 운반됐다. 로맨틱 코미디에서 웃자고 나올 법한 대사를 김 작가는 정색하고 수십 차례 사용했는데, 듣는 이도 그 대사에 담긴 사랑의 무게를 함께 느꼈다. 출발은 불륜이었고, 이서연의 병으로 신파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드라마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가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 희생을 기반으로 한 사랑의 원형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안겨줬다. 비단 이서연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산에 올라간 박지형(김래원 분)뿐만 아니라 이서연의 고모와 사촌오빠, 남동생은 모두 헌신적인 모습으로 이상적인 사랑을 구현했다. 그중 결정판은 박지형의 전 약혼녀 노향기로, 결혼식 이틀 전 파혼당했음에도 바보 같은 사랑을 끝까지 지켜가며 박지형에 대한 사랑을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이번에도 여전히 김 작가 특유의 속사포 같은 풍성한 대사는 유효했지만 ‘천일의 약속’에는 그를 압도하는 여백의 미가 힘을 발휘해 ‘시끄러움’을 상쇄했다. 또 이어지는 주인공의 독백은 마치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한 느낌을 전해줬다. 김 작가는 “지금은 사랑이 넘쳐나는 시대다. ‘사랑해요’라는 말이 깔렸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실종된 지 오래다. 이런 사랑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작 ‘인생은 아름다워’에서는 많은 일을 돌고 돌아 ‘그럼에도 인생은 살 만하다’고 따스하게 말했던 김 작가는 ‘천일의 약속’에서는 하늘이 원망스러운 황당하고 억울한 상황을 그리며 그 반대를 이야기하는 듯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천일의 약속’도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할 수 있는 것 역시 인생이라고 말했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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