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을 세계가 인정하는 초 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킨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
영일만의 신화를 창조하고 포항과 광양지역을 국내외를 망라한 굴지의 산업도시로 도약시킨 그의 경영철학은 ‘4가지해야 할 일’과 ‘4가지해서는 안 될 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박 회장이 강조한 ‘4가지해야 할 일’로 ‘최고의 기준을 고집’, ‘종업원들의 교육훈련’, ‘종업원들의 복지’, ‘모범이 되는 기업문화’를 강조했다.
이는 품질이 앞서지 않고는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기초아래 가장 귀중한 자산인 종업원들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 스스로가 먼저 모범이 되는 기업문화를 만들자는 그의 철학이 담겨져 있다.
또 ‘4가지해서는 안 될 일’로는 ‘원칙을 버리는 타협과 양보’, ‘최종기한의 엄수’, ‘뇌물과 촌지의 거절’, ‘절대 포기하지마라’를 내세우며 항상 원칙을 기반으로 한 기업 활동을 강조하며 기한을 엄수하는 신뢰성, 청렴성과 포기하지 않는 도전정신을 당부했다.
본지(本紙)는 박 명예회장이 생전에 보여준 경영철학을 중심으로 그가 우리 근대사에 남긴 크나큰 족적을 재조명하는 기획 연재를 통해 고인을 애도하고자 한다.
고(故) 박태준 명예회장은 지난 1992년 10월3일 정신적 지주였던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묘소를 찾아 포항제철소의 완공을 보고했다.
박 회장은 “임자, 정말 수고했어”라는 박 대통령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의 환한 미소가 번진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영면에 들어간 박 대통령은 말이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9월 영국 출장도중에 박태준 회장에게 “제철소를 건설하라”는 특명을 내렸고, 박 회장은 곧바로 38명의 창업요원을 이끌고 포항 영일만을 찾아 제철소 건설이 들어갔다.
1958년부터 시작된 종합제철소의 건설시도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5차례나 무산된 바 있어 이날 박정희 대통령의 특명은 박 회장에게는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당시 신생독립국은 자립의 상징과 국력의 상징으로 제철소를 건설했고 대한민국 또한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1950년대 초반 남한과 북한에는 과거 일본이 남긴 구식 제철설비만 있던 상황으로 북한은 청진과 나진에 연산 55만톤의 조강생산 능력을 보였지만 남한은 저급철을 생산하는 구식설비로 생산량도 연산 5천톤에 불과했다.
1957년 미국의 원조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힘입어 철강생산량은 차츰 증가해 약 20만톤의 생산량을 보였으나 약 50만톤의 소비량에 턱없이 모자라 수요의 60%인 약 30만톤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계속된 중간규모의 제철소 건설시도는 1958년까지는 자금부족과 기술 부족, 지도력 부재까지 겹쳐 실패했고 이후 1967년까지 세 차례 더 시도됐으나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시련을 거듭하던 제철보국을 향한 시도는 1966년 12월10일 미국 피츠버그에서 미국·서독·이탈리아·영국 등 4개국 7개사가 모인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 발족으로 시작으로 드디어 포항제철의 태동이 시작됐다.
당시 대한중석 사장이었던 박 회장은 1967년 9월5일 런던 메탈마켓센터에서 중석판매협상을 진행 중에 종합제철 건설추진위원장으로 내정됐음을 통보받고 대한중석의 민간 주주들을 설득해 대한중석의 자본 투입부터 종합제철 건설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1967년 9월28일 KISA와 한국협상 대표 간 기본계약서 합의각서에 치명적인 문제점을 발견한 박 회장은 기공식에 불참하며 박 대통령에게 이를 보고, 설득했고 1967년 11월8일 종합제철 건설추진위원장을 공식 임명됐다.
종합제철소 입지선정에 들어갈 1967년 6월 당시 연산 300만톤 규모로 확정된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해 300만평의 공장부지, 25만톤의 일일용수, 13만㎾의 발전설비, 연장 250mdml 접안시설 등이 입지조건으로 월포, 포항, 삼천포, 울산, 보성이 경합을 벌였다.
이는 최초 삼척, 묵호, 월포, 포항, 울산, 부산, 진해, 마산, 삼천, 여수, 보성, 목포 등 18개 지역의 후보지를 재선별 한 것으로 1967년 2월 코퍼스의 기술진이 삼천포와 울산을 후보지로 선정했던 선례를 뒤집는 결과였다.
입지조사팀의 결과를 바탕으로 1967년 6월24일 경제장관회의에서 1조4293억원으로 기타 지역에 비해 건설비가 가장 낮은 포항이 종합제철 후보지로 선정돼 현재의 포항종합제철소가 탄생되는 대한민국 근대사의 한 획을 긋게 됐다.
이를 두고 당시 지역의 어르신들은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가 이성지가 대나무가 난다고 예언했던 것이 적중했다고 감탄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풍수가 이성지는 ‘竹生魚龍沙 可活萬人地 西器東天來 回望無沙場’ ‘어룡사에 대나무가 서면 수만 명이 살만한 땅이 된다. 서양문명이 동쪽ㅇ으로 올 때 돌아보니 모래밭이 없어졌더라’며 포항종합제철의 등장을 예언했다고 전해진다.
공장 소재지의 지명을 따라 박 대통령이 ‘포항종합제철’로 정하고 1967년 4월1일 서울 유네스코회관 3층 포항종합제철 본사 사무실에서 박 회장이 손수 가려 뽑은 38명의 창설요원들과 창립식을 거행하며 공식적인 출발을 선언했다.
당시 취임사에서 박 회장은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 최소의 경비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제철소를 건설할 것”이라고 밝혔다.
1948년 육사에 입교해 당시 교관이었던 박정희 소령과 첫 만남으로 인연을 맺은 박 회장은 1968년 11월12일 포항제철소 건설현장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몸을 바쳐서라도 제철소를 완공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 박 대통령은 1968년 5월20일 완공된 롬멜하우스 난간을 잡고 휘몰아치는 바람 앞에 “이거 남의 집 다 허물어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거냐”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이에 박 회장은 기필코 종합제철소를 완공시켜 박 대통령의 신뢰를 회복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고 전했다.
박 회장은 수많은 비판에도 박 대통령이 가장 훌륭한 대통령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국민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지도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2편에서 계속)
강신윤기자
max0709@ksm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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