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 사망 10주기인 24일 중국 매체들의 `시중쉰 띄우기`가 한창이다.
이는 시 국가부주석이 올 가을로 예정된 제18차 당 대회에서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예약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인터넷 매체 동방망(東方網)은 "오늘로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인 시중쉰 동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째 된다"며 "시중쉰은 중국 공산당의 우수 당원이자 위대한 공산주의 전사이고 탁월한 정치지도자였다"고 치켜세웠다.
동방망은 아울러 시중쉰이 1913년 10월 15일 출생한 때부터 1949년까지 활동상을 담은 `시중쉰전` 상권의 작가인 자쥐촨(賈巨川)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의 생애를 조명했다.
`시중쉰전`은 상ㆍ하권 100만 자로 이뤄졌으나 2008년에 50만 자를 담은 상권만 출간됐다. 하권도 이미 집필은 완료됐으나 시진핑이 차기 최고지도자로 유력시되면서 출간이 미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내 각종 신문·방송, 그리고 인터넷 매체들도 이날 시중쉰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시중쉰은 뛰어난 공산당 전사였고 지휘관, 그리고 중국의 부흥을 이끈 정치지도자였다는 게 이들 매체의 공통된 평가다.
이들 매체에 소개된 시중쉰 이력을 요약하면 우선 그는 중국 북서부 지역에서 `홍군(紅軍)`을 이끌었고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고서 1953년 정무원(국무원 격)의 비서장으로 시작해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마오쩌둥(毛澤東)의 정적인 펑더화이(彭德懷) 계열의 인물이었던 탓에 이른바 류즈단(劉志丹) 사건으로 1962년에 숙청됐다가 덩샤오핑(鄧小平)이 실권을 잡은 1978년에야 복권되는 등 고난의 기간도 적지 않았다.
시중쉰은 무엇보다 경제특구인 선전(深천)을 설계한 핵심브레인으로 평가받는다. 후야오방(胡耀邦) 전 총서기를 지지하고 톈안먼(天安門) 사태의 무력진압을 비판했던 이력도 눈여겨 볼만하다.
시중쉰의 이런 부침(浮沈)은 시진핑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줬다.
공산당 고위간부의 귀공자였던 시진핑은 1969년 이른바 `지식청년`으로 분류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하방돼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시진핑은 이어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 정규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1975년에 추천으로 칭화대 화공과에 진학해 졸업했다.
그랬지만 시진핑은 부친의 부하였던 당 중앙군사위원회 겅뱌오(耿彪) 비서장의 비서로 3년간 근무하면서 인민해방군 내 인맥을 쌓는 기회를 잡기도 했다.
시진핑은 2003년 발표된 글에서 "나의 실용적인 사고는 당시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는 현재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시중쉰은 당 중앙정치국 위원, 부총리, 그리고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부위원장까지 지내다가 1993년 이후에는 관직을 전혀 맡지 않고 노년을 보내다가 2002년 5월 24일 88세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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